벙어리 개 (사 5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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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신자의 인생이란 자신의 목적과 탐욕을 이루어 가기 위한 시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본받아 걸어가기 위해서 허락된 시간들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감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주어진 시간들이 우리의 인생인데, 우리는 그 귀한 시간들을 나 자신의 성공과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허비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도구로 부르시고 인생이라는 시간을 맡겨주셨는데 우리는 숨쉬는 순간마다 나를 생각하고 나의 이득을 위해서 발버둥치고 동분서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고 시간을 아끼면서 성실하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하는 것이라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들이 아닙니다. 이 땅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빛되신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빛으로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라고 살려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것도 아닌 인생을 내것으로 간주하고 나를 위한 시간으로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밥을 먹게 하신 것도 건강을 주신 것도 직장을 다니게 하시고 돈을 벌 수 있도록 하신 것도 나를 잘살도록 하시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시기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데는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오직 내 한몸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증인 되어라고 맡기신 일터이고 환경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업을 하든, 학교 교사를 하든, 직장 생활을 하든, 외판원을 하든 그 자리는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할 증인으로서의 일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증인되라고 맡기신 그 자리와 환경에 매어버린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인생보다는 나 개인의 인생에 더 큰 관심과 의미와 목적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말씀의 묵상을 쉬어서는 안됩니다. 매일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하루에 단 한 장의 말씀도 보지 못한다고 해도, 하루에 비록 십분의 기도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단 한 조각의 말씀이라도 살아있어서 그 말씀을 되새기고 염두에 두면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줄 아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지 못하고 오로지 나를 생각하고 나의 인생을 멋있게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면 감히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예배시간이 되면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십일조도 철저하게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라고 자신하고 있다면 저는 분명히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착각일 뿐이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믿음이라고도, 하나님의 일이라고도 말씀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여러분의 마음에서 주님이 피흘리신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가를 찾으실 뿐입니다. 그 십자가의 흔적은 교회 잘나오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보다도 말씀만을 생각하셨던 그 모습대로 인생에서 자기 입장보다도 말씀을 먼저 앞세우려고 하는 그 마음이 곧 십자가의 흔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나와도 자기 입장을 생각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각하고 나와야 하고, 십일조를 해도 자기 입장이 아닌 말씀을 생각하는 십일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교회를 빠지지 않았다고 해도,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다고 해도,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의가 되지 않고 다만 말씀이 자신을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에 감사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 생활을 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안심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열심을 믿음의 흔적으로 착각하게 해서 자기 신앙에 안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에서 뭔가 잘하고 있다고 해서 결코 자신에게 안심하면 안됩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여러분을 자기 중심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행위를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내 딴에는 믿음생활 잘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돈만 바라보고 살았고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놀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 눈이 뜨인다면 여러분은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분명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증인은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새하늘과 새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은 없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세상을 알고 있고 그 세상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좀 부족하게 살고 힘들게 산다고 해도 '나는 좋은 것 때문에 힘을 얻어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 증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칭 증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9,10절을 보면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짐승들로부터 양을 지키는 파수꾼을 가리켜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고 말합니다. 양들을 삼키는 짐승이 와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경고하지 못하는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라는 것입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 개를 세워놓았다면 그 이유는 분명 짐승들이 올 때 짖어서 양들을 보호하고 지키라고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짖지를 못한다면 그 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양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세워놓은 개를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벙어리 개가 되었습니까? 11절에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라고 말씀하는 것 같이 개들이 관심을 양에게 두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고 자기 탐욕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교인이 자기 교회에 잘 나와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그리고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면 믿음에는 나무랄 것이 없는 교인으로 칭찬해 버립니다. 그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는 관심이 없이 다만 내 교회에 도움이 되고 있으면 그것으로 대만족입니다. 그런 교인이 돈을 잘버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사랑이라고 떠버립니다. 결국 목사가 사단과 한편이 되어서 교인들을 천국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의 관심이 천국이 아니라 자기 성공에만 쏠려있고, 주님의 십자가 대신에 교회 부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사람이 꿈꾸는 사람이고 누운 자고 잠자기 좋아하고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할 사람입니다. 이 세상보다는 하늘나라가 더 좋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세움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양들에게 하늘 나라가 더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사인 자신부터 세상 것을 하나하나 털어가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양들로 하여금 더 좋은 세계를 바라보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목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하늘나라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짐승들이 양들을 삼키기 위해서 다가와도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세상보다 천국이 더 좋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아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세상이 심판 당한다는 것을 경고하지 못하고 무엇이 구원의 길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세상과 똑같이 합류해서 탐욕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다고 합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내 한몸 밥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양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목사는 누구이겠습니까? 그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보다는 양들을 푸른 초장인 하늘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기를 쓰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목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는 절대로 '내 교회'가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구원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생명이 되지 못하는 이상, 양의 마음이 교회에 집착되고 교회에 매이는 것을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구원에 하등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에게 매이고 붙들리는 것을 경고하면서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그리스도만 목적 삼고 그리스도에게만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자가 참된 목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부터 내 교회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교회에 관심 두지 말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교회에 관심을 두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입니다.

자기의 삶을 위해서 교회에 붙어있는 자는 거짓목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복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공격이 들어올 수 있는 말에는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복음을 알고 성경을 안다고 해서 참 목자가 아닙니다. 알면 뭐합니까? 알면 그대로 말을 해야 하고 아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배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 때문에 자신의 삶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두려워 할 때 입을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살고 자신의 삶에 연연하지 않는 목사는 말 한마디하고 쫓겨난다고 해도 그 입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이미 성령이 그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그를 죽인다고 해도 복음은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을 바리새인들이 감당하지 못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거짓 목자를 세상에 남겨 놓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거짓 목자가 있음으로서 우리가 과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만을 따르고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목사가 아닌데도 목사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뒤만 따라간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거짓 목사인줄 알면서 혹 자신에게 교회적으로 어떤 불이익이 올 것을 두려워해서 그를 따라간다면 과연 그 마음에 주님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점검하라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주위에 거짓 목자를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저 역시도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제가 이시간에 순순한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이 저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지 저의 본성으로 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저의 본성도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하고 교회가 커지기를 바라고 돈 많은 교인이 교회에 오는 것을 기대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나를 주장하시고 제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만 향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이 시간 여러분에게 아무 두려움이 없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지 제가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저 역시 수시로 나를 생각하게 되고 내 살길을 염려도 하는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이 시간 여러분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오직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만 두려워하고 예수님만 따라가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두려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두렵지가 않고 힘있는 자가 두렵지가 않습니다. 내가 가난한 것이 두렵지가 않고 비천한 자리에 있는 것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오직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만 나타내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가 아니라 주님을 외치는 증인입니다.

오늘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만 푯대로 삼고 십자가의 길로 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은 관심 없고 오로지 내 인생에 모든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그럴 때 자신의 믿음 없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내 멋대로 실컷 살아가다가 교회 다녔다는 공로 때문에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천국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천국은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있고 고통이 있고 핍박이 있었던 사람들이 위로 받는 곳임을 생각하고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