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믿는가? (사 5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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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죽이는도다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 중에 너희 소득이 있으니 그것이 곧 너희가 제비뽑아 얻은 것이라 너희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이를 용인하겠느냐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그리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배반하고 다른 자를 위하여 몸을 드러내고 올라가며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처소를 예비하였으며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욱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원방에 보내고 음부까지 스스로 낮추었으며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아니함은 네 힘이 소성되었으므로 쇠약하여 가지 아니함이니라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 너의 의를 내가 보이리라 너의 소위가 네게 무익하니라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 가겠고 기운에 불려 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길을 다니다 보면 수 없이 많은 예배당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들은 하나같이 높은 종탑 위에 십자가를 내 걸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배당 위에 십자가를 세워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신자들은 십자가를 다만 기독교라는 표시로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신자들도 종탑 위의 십자가를 단지 교회니까, 예배당이니까 당연히 세워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아예 종탑 위의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예배당 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위에 십자가가 있든 없든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십자가의 정신과는 전혀 무관하게 모이고 흩어지고 있으면서 예배당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고 해서 교회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십자가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당 위에 십자가를 세워 놓은 것은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에 복종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며, 주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은혜만으로 감사하며 살고자 모입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만 존재한다'는 마음으로 예배당 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십자가가 무색할 정도로 자기 멋대로 입니다. 예배당에 와서는 '예수, 십자가'를 열광적으로 외치면서, 마치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전부인양 말하면서 예배당을 나서면 자신이 중심이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십자가의 정신도 팽개쳐 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불교의 조계종이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를 놓고 또 다시 예전처럼 폭력이 난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불교란 세속의 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가르친 도를 따라서 자신을 수행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히 버려야 하는 것이 '세속'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부처의 도만 있으면 된다는 종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여준 불교의 모습은 한마디로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를 얻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러한 불교를 바라보면서 '과연 저들에게서 절을 빼앗아 버리고, 불공을 드리지 못하게 하고, 부처 상을 다 없애버렸다고 할 때 과연 그들은 무엇을 힘으로 삼고 살아갈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신앙 대상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소망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신 예수님만 계시면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고 큰 소리쳐야 할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신앙은 보이는 것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이며, 따라서 보이는 것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보이는 것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신앙은 아무 변동 없이 마치 바람 한점 없는 바다가 잔잔하듯 조용한 신앙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까? 이것을 알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면 압니다. '내일 당장 집이 불에 타서 사라지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사기를 당해서 있는 돈을 몽땅 날려 버렸다'고 할 때, 그때도 과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변함없는 신앙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면 '너무 극단적으로 비유한다'고 할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반발을 합니까? 분명히 성경적으로는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반발을 하는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드러낼 때 반발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추구하는 바와 전혀 다른 말을 할 때 반발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위의 질문에 반발을 한다는 것은, 그 질문이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탐욕이 강력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말에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신앙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갈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저도 역시 신앙은 보이지 않는 분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것임을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이는 것에서 떠난 자는 아닙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 대한 탐욕을 벗어버릴 수 없고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제가 보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교회들이 스스로의 신앙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보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탐욕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신앙이 있다고 큰소리 치고 있는 것이 너무 역겨워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들은 '신앙이 없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자신감에서 떠나고, '나 정도면 분명 구원받을 수 있을거야'라는 교만에서 떠나서 찬송가 가사대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는 고백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역동적인 행동을 들고 하나님께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은, 세상 종교는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고, 인간이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하고, 도덕과 윤리적으로 잘 다듬어진 인격적인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혀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뭘 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은 모두가 죄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일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셨던 것이지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이것을 오해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전도하고 구제하는 것 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부르셔서 믿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여질 때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인간의 믿음이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고 '나는 믿음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만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신자들은 '하나님은 우리 행동을 보고 축복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해도 반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는 인간을 치지 않습니다. 다만 '너희들의 정성을 보여라 그러면 그만한 보답을 해 줄 것이다'는 것이 세상 종교, 즉 우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칩니다. 인간의 힘을 믿고, 할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진 인간을 치면서 무능력하고 가능성이 없는 자신에 대해서 발견하기를 촉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한 기독교가 세상 종교와 똑같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신을 찾아가고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에서 자녀를 죽이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는 변질될 대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수리나무 사이에서 귀한 자식을 잡아 바치는 정성을 보임으로서 하늘의 복을 얻고 구원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무당들과 함께 했다고 말합니다. 또 7절부터 보면 음행을 하고 쾌락을 즐기면서 종교생활을 했던 것이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믿는 것을 정성만 보이면 세상의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재미있고 기분 좋은 종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신앙이 즐기기 위한 도구로 전락된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이사야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의 의를 내가 보이리라 너의 소위가 네게 무익하니라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 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12,13절)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가 너희들의 정성을 가지고 복을 얻고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너희들에게 의가 되고 복이 되나 보자'는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자신의 열성으로 신에게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우상을 좇는 것이고 바람에 떠가는 것들이고 날아가 버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분명 13절에서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자신의 종교적인 열성이나 행동은 전혀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만 의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열성과 행위에 대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뢰하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할 만한 의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비록 돈이 있으면 세상을 살아갈 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 줄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끌어 모아도 의는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돈에 머물러 버린다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뢰하겠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종교는 돈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돈을 약속하고 돈을 복으로서 내려주겠다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땅을 약속하셨고 거룩한 산을 약속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이스라엘만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아는 자만 존재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 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뢰하는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또 거룩한 산은 시온산을 말합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성이 있는 산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장차 주어질 새하늘과 새땅을 약속하신 것이지 돈이나 세상의 것을 복으로 약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약속만 소망하고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아가지 않고 마음이 이미 세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믿음은 말뿐이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돈이다는 태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11절에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느냐?'고 묻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두려움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진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자신을 발견한 자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에게서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세상이 전부인 듯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만 보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을 자신의 인생에 득이 되는 길로 삼고,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우상을 끼고 있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바라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원을 이루고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돈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는 것도 아니고 갖고 싶은 것을 갖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국 '역시 세상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그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굳게 설려고 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하늘과 새땅에 굳게 설 그 날을 기대하면서 그 소망에 마음 부풀어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되 종교인들이 신을 믿듯 내 즐거움과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여러분의 전부가 되어서 그것 하나 바라보고 오늘의 고생도 어려움도 참고 견뎌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즐기는 것이 재미있다고 할지라도 역시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하는 땅에서 영원토록 거하는 기쁨과 즐거움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는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영생이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을 다 빼앗아 버려도 무너지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든든히 서가는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는 신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