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절에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계시면서 자신들을 돕는 것이 유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것이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육신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성령이 오신다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직접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설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신다고 해서 여러분이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셨는지 오시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 성령이라면 예수님의 이적을 직접 목격하며 사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날마다 예수님의 이적을 목격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까지 믿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고 목격하면 갈수록 좀 더 나은 이적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적에 대해서도 시큰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함께 하신다고 해서 그 믿음이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익입니까? 바로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고, 날마다 우리를 붙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놓으시는 것이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육신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가 제자들을 떠난다고 하시자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이 자기들에게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인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수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하면서 믿지를 않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돕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구원의 보증이며 기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신자에게 신비한 체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안받고를 자기 마음에서 느껴지는 어떤 현상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오시며, 우리는 무엇으로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8-11절까지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책망하시는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죄와 의와 심판이 세상에 증거되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않음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대로 선인이든 악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해를 비취고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힘과 노력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은혜로 살았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죄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며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모른다면 죄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것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죄가운데 있던 나를 책망하시고 애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의를 인간의 착한 행동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다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이 왜 의가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틀리고 자기들이 옳다고 해서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옳은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의로운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의롭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의로 여김 받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의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예수님의 행함만을 자랑하고 의지할 뿐입니다. 이것이 의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달은 신자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고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기 때문에 어떤 자기 행위도 의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임금은 권세 잡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권세 잡은 자에 의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면 남은 것은 심판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누구를 책망하십니까? 바로 세상속의 자기 백성을 책망합니다.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고 심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고 살아가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에 대해 책망을 받으십니까? 예수님의 행함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함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책망을 받으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심판임을 책망 받으십니까? 책망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성령과 함께한 삶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속에는 불의가 가득차 있는데 성령이 내 안에 오신다면 불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한 신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책망하면서 날마다 의로우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의의 행위만 자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으며 세상 것을 기준하여 사랑과 은혜를 평가했던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책망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