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강) 요한복음 16:19-22 근심과 기쁨

16장을 보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본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중점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보여줌으로써 오늘 우리 자신이 제자들과 같은 수준에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기대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나약한 모습 말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앞장을 서서 로마를 부수고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죽으신다고 하고 떠나신다고 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그냥 죽고 만다면 무엇 때문에 오신 것인지 이해 안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4:3절의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가시는 이유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계신 것에 있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고 관심거리인데 제자들은 관심과 기대를 전혀 다른 곳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것을 기대한다면 결코 예수님의 일이나 말씀에 대해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육신이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겐가 배워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의 생각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생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육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으로 바꾸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는 예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늘로 가셨고 육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볼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데 신자는 예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본다는 것입니까? 볼 수 없는데도 그냥 보는 척 하는 것입니까? 물론 개중에는 예수님을 본다는 의미도 모르고 또 보지도 못하면서 남들이 본다고 말하기 때문에 덩달아 본다고 말하는 것도 있겠지만 신자는 분명 예수님을 보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보며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가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안보이는 분이지만 영적인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보이는 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4: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본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육신으로만 보고 사는 제자들에게 믿음이라는 새로운 영의 눈을 주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오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주어질 때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이것이 곧 그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세상의 사람이 둘로 구분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자가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믿음이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신자의 구별입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곧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알았고 본다는 것이 곧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곧 기쁨입니다.

20절에 보면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근심거리가 되는 일을 없애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을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근심거리고 염려할 것 밖에 없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없는 세상살이에서 남는 것은 근심과 염려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에 근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셨기 때문에 근심할 것에 대해서도 말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질 때 그들에게서 근심 대신에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하늘을 소망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때,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그 일이야 말로 나를 살리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보증임을 깨달을 때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내 일이 잘되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수준과 같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를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새로운 하늘의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살아 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맥박이 뛰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생명이 있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죽었기에 예수님에 대해 반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21-22절에 보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는 아이 낳는 고통으로 인해서 근심을 하게 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그러한 고통과 근심은 다 잊고 다만 아이를 낳은 기쁨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를 낳았을 때의 기쁨은 보지 못하고 다만 고통만을 생각하고 근심을 합니다. 아이를 낳는 고통도 낳았을 때의 기쁨을 얻기 위한 잠시의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심으로써 근심을 하게 되지만 이것은 빼앗기지 않는 하늘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주신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소망하기보다는 세상을 더욱 소망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루신 하늘의 것으로는 기뻐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분명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어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육신에 머물므로 인해서 기쁨을 상실한 채 근심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신자는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시 태어났는데 옛사람의 생각 그대로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사람답게 새로운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좋은 것, 선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선한 것이 아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볼 수 없었던 하늘의 귀한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주저앉지 마시고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기쁨을 찾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