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강) 요한복음 16:23-24 구하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기도는 하나마나한 것이고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문제입니다. 대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으로 신앙적인 문제는 정당화 합니다. 자신의 신앙은 기도하는 것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관심을 갖고 내 요구를 들어주시도록 하는데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도에 대해 너무 이방종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바르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신을 절대로 정당화해서는 안될 것이며 오히려 기도하는 자신에게 어떤 탐욕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더 긴장하며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많이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없는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씀을 벗어난 것이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되 참된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신자들에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 사람들이 기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23절에 보면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23절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애매한 구절이 돼 버립니다. 그날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뒤에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아무것도 기도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아무것도 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은 신자가 기도에 있어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23절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해 보면 신자는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신자는 이런 사람인 것입니다.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동시에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33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신자는 분명 구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대로 주실 것이기 때문에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입니다. 성경대로 말을 해도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 것이고, 세상 것만큼은 넘치도록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의 것을 적게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결국 세상의 것을 우리의 기도를 따라서 주신다면 세상의 모든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은 하나님의 필요대로 주시기 때문에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면서 구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육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지만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기도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문제를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를 육신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만을 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문장대로 하면 지금까지 제자들이 기도하지를 않았는데 이제는 기도를 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지금껏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을 자신의 육신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기도라는 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생각한다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부지런히 했는데 정작 예수님 앞에서는 ‘너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는 말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결코 내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내 열심을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너무나 연약함을 알기에 믿음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심을 가진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기에 나를 아버지께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육신에 대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된 사람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문제 해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히 기도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구할 필요가 없는 성도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는 무엇이든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무엇이든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고 기도에 담겨 있는 신자의 기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