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강) 요한복음 16:25-33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생명, 평안,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구원을 원하고, 평안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지 진리 밖에서 살아가는지를 항상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진리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을 반석 위에 세운 집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람과 풍랑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집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중요성은 얼마나 잘믿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느냐에 있습니다. 진리 안에 있지 않으면서 잘 믿겠다고 애를 쓴들 그것은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개인의 열심히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약속하신 ‘무엇이든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신자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즉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이 다 들으시는 존재로 바뀐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자들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으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26절에서 말씀하는 그 날이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것을 두고 말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는 이 말씀에서 쉽게 이해가 안되는 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문장 그대로 풀이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게 되어진 자로 바뀐 것은 예수님의 기도로 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늘의 것을 보게 되고, 무엇이든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으시는 사람으로 되어진 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해서 되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 뒷 구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되어진 모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것도,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하시는 것도,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드러내시고 그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증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며 복을 달라고 하고,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결국 이미 확증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랑을 보이시고 사랑을 주셨는데 마치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것처럼 요구하는 것은 진리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은 무서워서 뿔뿔이 흩어지고 십자가의 고난의 현장에는 오직 예수님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참으로 외롭고 쓸쓸한 것이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3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평안으로 이어지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은 환경적이나 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그러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평안은 없어야 합니다. 가장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그것이 곧 아버지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쳐도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보면 그러한 말들이 말 자체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아는 지혜가 어떤 능력으로 드러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면 그 앎은 평안과 다대함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에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말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지를 못하면 신자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은 항상 그럴듯한데 삶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웠던 것 힘들었던 것,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부르시기 위한 조치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쉬지 않고 우리를 세밀히 살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붙드시고 기어코 천국으로 집어넣기 위해 때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저와 여러분을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평안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 걱정은 현재 일의 결과를 알 수 없을 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해가 되는 길로 밀어 넣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기에 어떤 일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 때 비로소 평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라는 것은 힘을 내라거나 용기를 가져라는 뜻이 아닙니다. 없는 힘을 어떻게 낼 수 있으며, 없는 용기를 어떻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 신자의 담대함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담대하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사랑에 거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