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강) 요한복음 17:1 영화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것은 신자에게는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과는 다른 길을 가면서 천국에 가겠다고 설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단지 하나님으로서 능력을 보여주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하늘나라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삶이 어때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의 삶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거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7장은 모두가 예수님의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 개인의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원칙을 분명히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첫머리에 영화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기도와 똑같은 말로 기도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기도와 같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화와 우리가 말하는 영화가 전혀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의 의미가 다르다면 아무리 영화롭게 해달라는 말이 같다고 해도 절대 같은 의미의 기도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화라는 것은 영광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영화롭게 하라는 말은 영광스럽게 해달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화, 영광이란 육신의 조건과 신분이 나아지고 상승되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러움을 받고, 존경을 받고, 높임 받게 되어지는 것을 영화롭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과연 그러한 의미로서 영화를 말씀하였겠습니까?

이부분에서부터 벌써 예수님과 우리의 생각이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생각, 그 마음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 뜻은 버린 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엉터리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내 생각과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과 뜻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영화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영화, 영광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구한다면 분명 그것은 잘못된 기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은 ‘내가 잘돼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 아니냐?’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영광을 정당화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버지께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1절 뒤에 보면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영화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는 것이 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으로부터 모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현장입니다.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고 완성된 현장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신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일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 자체를 영화롭게 되는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화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증거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가 무엇으로 연관되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순종으로 인해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이 주어진다고 해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도구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자신이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일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겠다는 발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관심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믿음을 은혜로 받은 신자라면 관심이 점차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신자라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증거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방해하는 악한 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두고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어떤 마음이 실려 있는가를 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곧 우리를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