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강) 요한복음 17:4-8 하나님을 아는 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영생은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나약한 것으로 전락돼 버릴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현재 우리들의 신앙이 그런 모습에 처해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영생이라는 엄청난 기적을 소망하면서도 막상 현세에서의 삶은 세상에 매어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본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코 현세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털어버리는 것이며 나약한 것이 아니라 강하고 힘있는 것임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으셨던 예수님이 당당하게 사셨던 그 모습이 오늘날 신자들을 통해서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안다’는 문제입니다. 과연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우리의 앎에 대해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존재하시는 영이시고 인간은 땅에 존재하는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시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6절을 보면 세상에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낸다는 표현을 쓰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지상에 모셔 와서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이름을 나타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이름을 가진 분을 대신하여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에는 그분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아버지의 성품과 일하심 모두를 나타내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모두가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고 나타내는 것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다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세상 모두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에게 나타내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에게만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은 누구나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한자 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택한자 들에게만 하나님을 나타내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버지에 대해 무지합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해도 세상은 깨닫지를 못합니다. 자기들만의 신,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지식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러한 지식은 유대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부인하셨습니다. 따라서 바꿔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하면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유대인처럼 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이 곧 신앙인줄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잘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인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교회에서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이고 종교의식과 행위를 부지런히 하는 것인 줄로 안다면 그것은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한 적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하라고 주신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이 뭐겠습니까? 당연히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4절을 뒤의 구절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주고 세상일을 실패하지 않게 도와주고 복주는 자신만을 위한 신이지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구원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감히 그 앞에서 세상의 복을 언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참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만났기에 세상의 복이 복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것은 고난이고 죽으심이었습니다. 그것이 땅에서 예수님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하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지 않으신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주지 않습니다. 아들에게 주신 것 말고 다른 것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준비하고 계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 영광을 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연히 세상의 영광을 위해 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 영광을 구하면 잘못된 기도가 되기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세상 영광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십자가를 말하면서 세상의 복과 영광을 소망한다면 그건 절대로 십자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다면 그러한 모습은 보여 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제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머리에 담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시면서 여러분의 앎은 과연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8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임을 참으로 안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믿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때문에 말씀을 가지고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된 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 영광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영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여전히 세상의 것을 구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하늘을 보여주는 삶은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증거물입니다. 이 증거물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지고 증거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