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결정과 선택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신자가 되어지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결정, 그리고 선택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인간의 의지와 선택은 하나님을 향하지를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각할 때 유익이 되는 것을 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역시 뭔가 유익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에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인의 특성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관심을 가져봐야 자기 신앙이고 교회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그것을 가르치니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철저히 그리스도를 배척할 뿐입니다.
이러한 틈 속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일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신자 됨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며 선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말씀을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오직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은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성경책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말씀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내 머리에 남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외우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남지는 못합니다. 이는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에 담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곧 말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은 신자는 말씀으로 인해서 깨닫게 된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 머물게 되는 것이고 이 확고한 신앙은 어떤 환경과 형편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잠시 흔들림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백성들에게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지는 것이고, 다시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 3:16절에서 말씀하는 세상은,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상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택함 자들에 국한 된 세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과 확정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의 종교 행위를 개입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 행위나 열심 감정 등은 하나님의 선택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은 저희가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으며 아버지께서 보내신 줄을 믿었음을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모른 자들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교회를 다니는 사람치고 모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실을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예수님을 아버지가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는 차원이라면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아버지가 보내셨다면, 결국 세상에는 구원의 가능성을 둘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된 앎입니다. 참된 앎과 믿음은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시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다만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는 수준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한 수준으로까지 자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님에게 붙들리고 매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을 것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먼저 1절에 보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은 아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아들에게서 죽고 사는 생명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히 아버지의 영광은 나타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죽으심과 부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1절의 말씀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 믿음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영광 받으실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곧 나의 부활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을 때 그것이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두렵지 않게 하고,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때 그 믿음이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영광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복된 것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바꿔놓습니다. 세상에 좋은 것을 바라보고 살던 우리에게 하늘에 더 좋고 귀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하늘의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규례와 법칙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붙들려서 불려 나온 자입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입장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서 구출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영원히 저주와 사망에 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은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이 완성되어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으며 그리스도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실천을 가지고 예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한다면 이미 출발부터 하나님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결국 자기 행위를 과시하는 것으로 열매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라 말씀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강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되는 삶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편함을 위해서 힘을 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심으로써 예수님에게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