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선악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은 결국 인간의 지식입니다. 저마다 자기 입장과 지식이 기준 되어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보면 선과 선이 대립되고 저마다 상대방의 선을 악으로 규정하기위해 애쓰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선의 기준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며 모든 세상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 악은 결국 심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진리를 말하면 외면해 버립니다. 이유는 진리가 결코 세상의 유익을 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서로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공통점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세상의 유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은 진리를 선으로 받아들이며, 진리를 기준으로 해서 선악을 판단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진리는 그 무엇에도 양보될 수 없는 절대 원칙입니다. 따라서 이 절대 원칙을 포기한 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은 믿음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의 믿음이 과연 진리 위에 굳게 서 있는가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될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란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아야 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을 본받아 산다면 그것이 곧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어려운 점입니다.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백조의 새끼가 오리 새끼의 틈바구니에서 오리들로부터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는 천대를 받고 살다가 결국 자신이 백조임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는 마치 오리들 틈에 끼어 있는 백조와 같은 존재입니다. 때문에 구별된 존재로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차리라 세상을 빠져 나와서 신자끼리 어울려 살면 그나마 낫겠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에 집어넣으시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하시면서 신앙으로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신자는 진리를 바라보고 하늘을 소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잘못 가고 있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신자는 그렇게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돈 때문에 불의를 행하고, 내 유익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처럼 내 유익을 따라가는 것이 곧 진리를 버리는 것이고 역시 세상 것이 좋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세상을 염두에 두지 말라는 말이고,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오면서 세상의 속성을 몸으로 배워 알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사랑할 때, 진리만을 원할 때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제나 진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신자에게 세상의 유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세상의 유익을 제공해준다면 진리를 증거한 사도들이 진리 때문에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의 신앙에 진리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신 돈과 출세 등 세상의 복이 들어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인데, 영원한 생명보다는 세상에서 대가를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신앙에 있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에 대해 깨어있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람이 롯에게 자기를 떠나라고 하면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땅의 선택권을 롯에게 준 것입니다. 그때 롯이 선택한 것은 보기에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게 보인 요단이었습니다. 롯이 땅을 보는 기준은 어디 가면 먹고 살기 좋으냐는 것이었습니다.
요단에는 장차 하나님께 멸망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의 악함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땅의 윤택함만 본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며 삽니까? 세상이 하나님 동산 같고 애굽 땅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의 악이 보입니까? 세상에서 멸망당할 악을 본다면 세상은 결코 신자가 본받고 따라갈 곳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고 19절에 보면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거룩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이 나를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이 있는가 없는가로 세상을 판단하십니다. 우리에 대해서도 역시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리에 마음을 두고 진리로 살고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신자로서의 본질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신자는 진리로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이미 신자는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보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진리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살면서 세상의 악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진리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