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강) 요한복음 17:20-23 하나됨

세상의 것에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진리가 채워줄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하나님께 더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두는 하나님도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신다고 말하면, 그것보다는 육신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 ‘예수가 밥먹여 주냐?’라는 말로 무시해 버립니다. 이 말은 모든 가치 평가를 밥이 되어지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분명 쓸데없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한쪽에 울타리를 쳐 놓고 믿는 사람을 따로 분리해 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섞여 살고는 있지만, 그 생각만큼은 절대로 섞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신자로서의 생각과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보면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신자가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사람들은 삶의 모든 목적을 자기 육신에 두고 있지만, 신자만은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목적 사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일 때 세상에 대해 여유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는 것 나에게 없다고 해도 상관없고, 남들이 사는 것처럼 못산다고 해서 한탄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그 마음에 있는 모습이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20절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누구를 위해서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당시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믿음이 있게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한 기도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이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지금 이 시간도 세상을 향하기보다는 하늘을 소망하고 예수님께 내 마음을 두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자기 신앙에 대해 교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난 자가 세상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것이 곧 새롭게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되어지지 않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은혜며 복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쪽에서 하나님을 믿어주고 섬기는 것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을 두고 신앙, 즉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 되게’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신자와 예수님과의 하나됨, 신자와 신자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됨에 대해 말할 때, 신자끼리의 하나 됨은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육신으로 존재하고, 교제할 수 있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만 맞으면 하나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맞았다고 해서 하나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신앙이 아닌 것에서 하나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악한 속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악한 속성은 서로 통하여 얼마든지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통한다고 해서 하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하나 됨은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면 자연히 신자는 서로 하나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하나 됨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에 보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이 나에게도 주어졌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무조건 잘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참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세상을 보호해주고 잘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굶어 죽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완벽하고 온전한 사랑을 베푸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신자로 하여금 아들이 받은 그 사랑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된다는 것은 신자의 육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 됨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세상으로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은 무엇입니까? 이 역시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편안한 것도 아니었고, 세상의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세상의 반대를 받고 죽으셨습니다. 뭐가 아버지의 사랑입니까?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 즉 하늘의 영생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하늘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편안함은 없지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 것을 구한다면, 세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실망하고 한탄하며 산다면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 것으로 확인되어진다면 사랑을 보이는 것은 부자들, 성공한 사람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는 압니다. 성경을 통해서 배웠다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자연히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의 좋은 것을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서 건져주신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여러분은 서로 하나된 관계로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 것을 보지 않고 하늘의 영생만을 소망하며 사는 관계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