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강) 요한복음 17:24-26 하나님을 아십니까?

세상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한 것뿐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아이가 저에게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는가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말 외에 달리 할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러한 말씀조차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로 일관되어 있고, 신약에는 예수님의 행적과 사도들이 복음에 대해 가르친 내용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개입한 역사입니다. 즉 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셨는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 역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일하는 분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고, 사도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안함과 성공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사도들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도구로써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상상된 우상, 즉 인간의 탐욕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라 이름하는 우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이 문제를 말씀하시고 기도를 마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의 마지막이 아버지를 아는 문제를 언급하고 마쳐지고 있다는 것이 뜻밖입니다.

25-26절을 보면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는 기도를 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택한 자들에게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는 분으로 세상에 오신 아들로 인해서만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하나님을 모른 것으로 여겨진다면 반대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안다는 결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세상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일컬음 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앎은 아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유대인만 보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민족으로 자처했습니다. 자신들만큼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를 아는 상태는 결코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두고 말씀한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법을 잘 지키기를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담겨 있는 십일조나 제사, 안식일, 이런 것을 지키는데 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십일조를 행하고 제사하고 안식일 지키는 것으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은 그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을 위해서 메시아를 보내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힘이 있는 용사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낼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앎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긴 하셨으나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약자의 모습으로 메시아를 보내셨는가?’를 알아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을 알았다면 아는 것으로 끝납니까? 26절의 말씀을 보면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제자들 안에 있고, 그 사랑으로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함께 하시는 것을 위해 아버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버지를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아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많이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말은 추상적인 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아십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함께 함을 아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아버지를 아는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사랑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잊지 마십시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을 살리셔서 영원한 나라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제자들 안에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미움을 받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에서 편한 인생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5절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잊지 마시고 여기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을 첨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것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고, 세상 것이 풍족하게 주어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고 사랑하신다고 여기고,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이 아버지를 아는 수준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택한 백성을 사망에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들을 보내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심으로써 그 사랑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십자가로 증거된 아버지의 사랑을 안다면 세상에서 어떤 형편과 상황에 처하든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를 때는 세상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알게 되면 세상을 전부로 여기고 살았던 것에 대해 애통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께 하늘의 생명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붙들린다면 여러분의 삶은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