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강) 요한복음 18:1-5 예수님의 길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되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결국 소망은 소망으로 끝나버리고 언제나 원치 않는 길로 가야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낙심을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신자의 바른 태도인가를 다시 한번 물어야 할 것입니다.

18장부터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수난 당하신 십자가 사건은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만큼 십자가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아는 것과, 십자가로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연 우리가 잘 안다고 자부하는 십자가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잘 안다는 것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가볍게 여길 수가 있지만, 만약 십자가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예수님만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만 해당된 것이라는 생각이 십자가 사건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에 대해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당할 일에 대해 아셨다는 것은 얼마든지 피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피하지 않으시고 고스란히 모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일부러 고난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부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맞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점을 치는 이유는 앞일을 미리 알아서 좋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미리 막아보자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내일 당할 일을 미리 아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모두 내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가령 한 달 후에 어느 지역의 어떤 땅이 수십 배로 오른다는 것을 아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오를 땅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입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틀리는가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말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라 해도 당장 수십 배의 이익을 포기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당할 일이 미리 아시고 당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분명 우리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할 일을 아시고 수난을 받으신 것은,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아버지의 뜻이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인생은 세상이 볼 때는 비참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은 죽음으로 인생을 끝낼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분명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안다 하고 예수님을 말하는 자가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그가 진정한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끼리 모여서 소리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모여서 말하고 소리치는 것대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우리끼리 모여서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끼리 모여 있으면 모두가 신자 같습니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만 믿는 신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세상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습니까? 신앙은 교회용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기 위해 믿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세상 안에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세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 것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욕을 먹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지 욕을 먹는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욕을 먹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것의 결과입니다. 결국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방해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나의 유익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지신 짐은 거부해 버린다면 그것을 두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모든 짐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짐을 지는 것을 회피합니다. 아무런 짐도 지지 않은 채 살다가 마지막에 좋은 것은 내 소유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말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생각이 곧 오늘 우리들의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에게 있는 원망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속셈도 있었는데 어려움이 닥치니 원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같은 수준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으면 안된다는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삶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를 인도해도 복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신자에게 있어서 손해 보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위로와 기쁨과 감사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로 산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인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며 산다면 얼마나 큰 손해겠습니까? 세상 것은 영원히 우리의 소유로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내 수중에 있을 뿐입니다. 한순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세상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가기를 힘씁시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 생각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갑시다.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