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강) 요한복음 18:6-11 베드로의 검

<본문>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 18:6-11)


<설교>

신자에게 자신의 현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현실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가 추구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시는 것과 이스라엘이 자신의 현실을 보는 것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현실문제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보는 현실문제는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구원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필요한 것은 의입니다. 의가 없는 세상이기에 의로우신 분이 오셔서 세상을 구출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해방이라는 현실문제에서 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용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사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 같은 자는 필요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필요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져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18장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11절에 보면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모두가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모두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저자의 기록의도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저자의 기록의도와 배경에 의해서 이해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중복되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같은 해석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고 말씀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천사들을 불러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붙들려 죽으시는 것은, 그렇게 해서 성경을 응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검으로, 즉 힘으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 즉 희생과 섬김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행위에 대해 다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을 쳐서 귀를 떨어뜨린 자가 베드로라는 이름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책망하실 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어떻게 보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과 베드로를 같은 속성을 가진 자로 일치시키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힘에 의해 죽으셨음을 말함으로써 예수님과 힘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힘을 가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힘을 버리는 것이 믿음이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것까지 참으로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1)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장면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을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는 문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의 대적을 위해 죽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희생과 섬김으로써 고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묘사하는 것이 누가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붙잡혀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붙들리고 죽으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결코 성경을 쉽게 소홀히 대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주의 깊게 살펴야 하고 그래서 성경마다 전달하고 있는 예수님을 깨닫고 그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고 일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위기를 피할 수 있고, 또 물리칠 수 있지만 잠잠히 붙잡히시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힘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검을 집에 꽂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검이 있으되 그것을 빼지 않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할 것은 눅 22:35-36절의 말씀입니다. 거기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검을 집에 꽂으라는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또한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말씀에도 위배되지 않습니까?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다고 하시면서 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35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보냄 받았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로 보내어졌는데도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있더냐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보내셔서 하게 하신 일이 돈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돈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은 돈 가지고 힘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으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힘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냄 받은 자로서 진심으로 예수님만을 전하는 자로 살고자 힘쓴다면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복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조건이 충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만을 전하고자 한다면 달리 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들려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지는 것임을 베드로는 몰랐던 것입니다.

세상은 칼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칼로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며 힘을 과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칼이 있으되 칼을 휘두르는 자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칼 자체가 자신의 힘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또한 신자로서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령한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늘의 복된 것에 모든 마음을 두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칼을 원하고 칼을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과 어긋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또한 세상 것이 아닌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칼을 휘둘러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한 자신도 지지 않기 위해서 칼을 구하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모습을 잃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검으로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다는 말씀처럼, 교회가 힘을 추구하면 그 교회는 망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거대하다 할지라도 그 심령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있다면, 십자가의 정신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망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쇠약해져 있고 피폐해져 있는 교회라 일컬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교회에 올 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가 재물의 소유를 기준으로 해서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고 차별하여 대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의 단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교회의 가장 악한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힘을 원하기 때문에 힘이 된다고 여겨지는 부자에 대해서 마음이 쏠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은석교회는 결코 이러한 악한 길로 가지 않도록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원하면 이 교회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회가 되어져 버림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신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다 보니 하나님이 주신 것 말고 또 다른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칼로써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검을 꽂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혈기가 아니라 죽는 것임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칼을 빼어서 남을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칼을 꽂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칼이 있으되 칼이 없는 약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길이며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