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한복음 18:12-18)
<설교>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일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이 사건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할 때마다 예로 들어 설명되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결론이 ‘우리는 베드로처럼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자’라는 것으로 내려지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본문이 너무 가시적인 교훈으로 이해되고 있는게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싶어서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내 목숨까지도 버리겠다’는 결단과 각오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은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따를 것을 각오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각오와 결단도 막상 생명에 위협을 주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수시로 각오하고 결단하며 삽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 ‘예수님만 믿어야지’라는 각오와 결단을 다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각오와 결단이 나의 신앙을 지켜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수시로 체험하지 않습니까?
신앙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는 것입니까? 내가 각오하고 결단했다고 해서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각오하고 결단하면서 자신을 다지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앞에서 ‘설사 목숨이 위태로워도 주님을 안다고 해야지’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나약한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인간은 자기 환경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신앙에 대해서는 큰耔고리 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시는 상황과 환경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안나스에게 끌고 갑니다. 요한은 안나스를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14절)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시 예수님이 유대를 소란케 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유대를 위해 예수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가야바란 이름은 마태나 마가 누가가 모둔 언급하고 있는 이음이기는 하지만 가야바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은 요한만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대표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을 나타내 보여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유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유익을 위해 예수를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역시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가야바와 베드로를 언급함으로써 예수님이 자기 유익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음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 유익보다는 육신의 유익에 더 치우쳐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유익을 위해서는 차라리 잠시 예수님을 잊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나의 결단과 각오로 예수님을 믿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7: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 역시 자신이 원하고 생각한바 대로 살아지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고민하고 애통해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원하는 선은 하지 못하고 원치 아니한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을 두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이 믿음과 감사가 바울을 강건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힘으로 뭔가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강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깊이 깨닫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강한 마음이며 그것을 신앙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내 자신을 붙들어서 행할 바를 가르치고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두고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생각과 의지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의지 내 생각은 오직 내 편입니다. 따라서 내 육신에 위험이 닥칠 때, 또는 유익이 되는 일이 있을 때 결국 내 자신에게 유익 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내 생각이며 의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행하게 되는 것은 원치 않은 악일뿐입니다. 결국 내 몸이 나를 사망으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망에서 나를 건질 분이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감사함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은 비록 그리스도안에 있다 할지라도 육신이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서 끄집어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육신을 중심으로 육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을 보내신 감사함 밖에 없습니다.
뭘 해야 하겠다는 생각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고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부터 회복하십시오. 감사함은 여러분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