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강) 요한복음 18:15-18 인간의 연약함

<본문>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5-18)

<설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가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강한 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연약한 존재가 강한 분을 의지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는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고 그 법에 순종하고자 하는데 정작 육신은 죄의 법을 따라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죄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죄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죄가운데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 안짓겠다고 아무리 각오하고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결단한다고 해도 결국 소용없는 행위로 드러나고 맙니다. 40일 금식기도하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죄짓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육신을 가진 인간의 한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육신으로 극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자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육신을 벗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기 전까지 죄에 대한 문제는 해결이 안되니까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육신은 숨을 쉬고 있으되 죽은 자로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갈 5: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죽음입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 정과 욕심이 함께 죽습니다. 결국 육체가 살아있으니 그 정과 욕심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까?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욕심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욕심이란 육체에 대한 소망이며 욕망입니다. 따라서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육체에 대한 소망이 사라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육체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육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뛰어난 육체가 되어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육체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이 곧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망은 무엇으로 끊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소망이 다른 것으로 바뀌면 되지 않겠습니까? 육체의 소망으로 살던 사람에서 영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자연히 육체의 소망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썩어질 육체에 대한 소망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이것이 곧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육신에 대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즉 육신에 대한 욕망이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즉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있게 된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육체를 못박는 것은 우리의 무능함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주어진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며 세상의 생명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육체를 못박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자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으면서 나의 소망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연약한 나를 구원하시고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에서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능한 존재며 연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능하고 연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해도 될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랑할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세워서 이루신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욕망은 무슨 일이든 자신을 높이는 쪽으로 끌고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에 의해 자랑이 나오고 자기 과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서로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연약함에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육체의 문제가 우리를 예수님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우리의 실체임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머리 숙여 하나님의 도움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안됩니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없이 산다면 그것은 뭔가 의심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합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나쁜 행동을 죽이고 착한 행동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몸의 행실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악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높이고 자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뤄보려고 애를 쓰게 될 뿐입니다. 때문에 사망에 처하는 악한 행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으로써 죽이라는 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의 악함을 책망 받고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자로 살아갈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망에 처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들 그 모든 것은 사망속에서 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육체로 사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러한 운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힘을 자랑할 수 있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베드로처럼 날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손을 예수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육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사망으로 끝날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육체를 자랑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아는 영의 사람이 되어진 것을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 더 복되고 대단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을 진심으로 깨닫고 감사하며 산다면, 그것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귀한 것을 얻었기에 육체의 욕심에 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