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강) 요한복음 18:19-24 인간의 부패성

<본문>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요 18:19-24)

<설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신앙으로 살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감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육신 앞에서 인간은 연약할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며 다시금 주를 바라보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신의 삶에 매어 산 사람이라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십일조 하고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신앙으로 여김으로써 신앙의 문제점을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교회 생활로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 일에 부지런한 자신을 바라보며 믿음에 전혀 문제없다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항상 세상을 향하고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의 욕망을 이길 수 없음을 자각할 때 연약함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더욱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 마음으로는 내 모든 것 다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한다 할지라도 내 육신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하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사건이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인간의 부패성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이 붙들려 온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전파하신 교훈에 대해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20절)고 답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제사장이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 물은 것은 예수님이 전파한 교훈의 사실여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답변이 너무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사장이 ‘이런 교훈을 한 것이 사실이냐?’는 식의 질문을 했다면 ‘그래 사실이다’는 말 한마디면 간단할 것입니다. 굳이 ‘나는 드러내놓고 말했으니까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는 뭔가 복잡한 듯하면서 답변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듯한 답변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물음에 대해 ‘그래 사실이다’는 답을 하셨다면 제사장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이 전파한 교훈에 대한 사실 확인이 전부일 것입니다.

제사장이 예수님에게 교훈에 대해 물은 것은 심문을 해서 죄가 없으면 풀어줄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꼬투리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사장에게 예수님은 ‘그래 사실이니까 빨리 날 죽여라’는 반응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들었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 너희가 나를 죽였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한 답변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전혀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교훈을 들었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교훈을 트집 잡아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답변은 진리를 들었으면서도 진리를 배척하고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진리를 들었고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가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까? 혹시 진리를 배척하는 자가 곧 우리 자신은 아닙니까?

제사장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트집을 잡는 것은, 교훈의 내용 자체가 문제가 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파하신 모든 교훈들이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배척하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고 밀쳐내며 죽이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를 들었으면서도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진리가 우리의 생각과 기득권을 옹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진리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진리를 오히려 인간의 부패성을 드러내고 지적하고 책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진리의 말씀 앞에서면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을 들었고 안 사람으로서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알았다고 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말과 행동이 각기 따로 노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교훈의 말씀을 들었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심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나타날 때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자신은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진리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 감정 내 생각조차 진리에 순종하기를 힘쓰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진리가 뭐라 말하든 내 생각과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인간의 부패성은 진리에 대해 배척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때는 결코 진리로 간주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겠다는 것이 인간의 고집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런 고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의 말씀은 진리를 들었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무시를 받는 것입니다. 과연 그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마음이나 편하게 해주는 위로의 말씀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부패한 인간에게는 그 속을 찌르는 송곳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 말씀을 원하겠습니까?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치명적인 일은 예수님의 제자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붙들린 지금 예수님을 찾거나 함께한 제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도망을 쳐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에 대해 실패한 스승으로 비춰질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감추지 않고 그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들었고 배웠던 제자들까지 예수님 편에 있지 않았음을 말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부패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22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에 대한 태도가 불순하다고 해서 하속이 예수님을 친 것입니다. 이 하속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대제사장이란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때려서 자신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즉 예수님을 배척하고서라도 자신의 이득을 따라 행하는 부패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말하는 우리가 가는 길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점을 두고두고 묵상하면서 여러분 자신의 길을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패한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살리시고 생명을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은총과 희생과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자신의 연약함과 부패함에서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날마다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통회하는 마음을 주의 은혜에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자는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에 깊이 빠져들 때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게 하고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부인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사랑이 능력이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이 자기 힘과 의지를 가지고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예수에게서 세상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서 인간의 연약함과 부패함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부인하며 살아가고 진리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연약함과 부패함을 모두 짊어지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을 속 중심에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잃지 마시고 여러분의 심령이 은혜와 사랑과 긍휼로 채워짐으로써 날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삶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고 살아가는 그가 진정으로 복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