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강) 요한복음 18:28-32 행악자

<본문>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28-32)

<설교>

본문 28절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 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들의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들의 신앙은 자기들의 법과 율례를 철저히 지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을 끌고 온 자들은 빌라도의 관정에까지 왔으면서도 관정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이유는 더럽힘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관정에 들어가면 자신들이 더러워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면 그것은 곧 이방인과 함께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28절에도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초대를 받아 갔을 때 유대인들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말을 한 것이 나옵니다. 십자가 이후에 사도들도 이러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어떠했겠는가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들의 율례에 철저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자기들과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예수님이 그들 눈에 신앙이 온전한 사람으로 보여질 리가 만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행악자라는 것은 살인과 도적질 같은 나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큰 행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의롭게 하고 법을 지키며 정당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오늘날 어떤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으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로운 것으로 여기고 정당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엉터리고 잘못된 것임을 고발하고 드러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믿으라는 말씀 자체가 곧 유대인들의 노력과 공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유대인들을 노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함에 의해서 자기들의 의의 기준이 도전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을 행악자로 규정하고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불필요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의에 큰 걸림돌이 되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도 자기들의 의로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예수님의 의를 팽개쳐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잔치 집에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것으로 트집을 잡습니다. 또 하나는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고 트집을 잡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트집을 잡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주위에서 어떤 사람은 성경을 많이 보는데 다른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을 때 누가 더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까? 우리의 판단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경을 많이 본다는 것에 기울어지기 십상입니다. 이것이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우리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던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가를 보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리 창녀들을 멀리 하는 것은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도 창녀에 대해서는 더럽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창녀는 더럽고 나는 깨끗하다는 생각입니다. 창녀는 몸을 파는 일을 하니까 더러운 존재고 나는 그런 일을 안하니까 깨끗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곧 유대인의 시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악하고 더러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에게서 이 더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나의 행위에서 더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십일조를 하는 행위에서 더럽고 악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교회를 다니고 십일조를 하니까 나는 깨끗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깨끗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악하고 더러운 자들이 모여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다같이 악하고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차별하고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 고소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행악자는 유대인 그들이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그것이 곧 예수님에 대한 행악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높인다고 말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 ‘예수’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이 높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예수 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이로움의 근거로 삼고 '이러한 것을 하니까 나는 믿음이 있다'는 자기 교만으로 나아간다면 오히려 예수님에게 행악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죽는 그 순간까지 버리기를 힘써야 하는 것은 자기 의이며 자기 공로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할 때일수록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하면서 자신을 경계해야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악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나를 경계하지 않으면 내가 곧 예수님에 대한 행악자로 나서게 됨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믿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오늘 내 자신이 이러한 가난한 심령으로 그리스도 앞에 섰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그래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면 나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네?’ 라는 한순간의 생각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마시고 평소 그런 심령으로 살았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혹 형제를 대할 때 ‘너는 왜 그것 밖에 안돼’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누군가보다 낫다는 생각만큼은 버려야 합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누군가와 비교하고 싶거든 예수님과 비교하십시오. 큰소리 치려거든 예수님 앞에서 치기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 앞에서 큰소리칠 수 없는 입장이라면 형제에 대해서도 그런 입장으로 대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행악자라 하며 죽였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고 어떤 열심을 내고 있는가? 라는 문제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도 교회를 잘 다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가를 물으십시오. 분명 우리는 그 물음 앞에서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상태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공로와 의가 주께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는 것이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행악자로 나아갈 뿐입니다. 율례를 빙자하여 형제를 악하다 정죄하고 죽이고 상처 주는 이것이야 말로 행악자의 모습인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