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강) 요한복음 18:33-38 빌라도와 진리

<본문>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한복음 18:33-38)

<설교>

본문은 유대 총독인 빌라도가 자신에게 끌려온 예수님을 심문하는 내용입니다. 우린 이러한 빌라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익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3절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34절)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다른 세복음서와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나 마가나 누가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물음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신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대할 때마다 신자들이 가지는 혼란은 ‘과연 누구 말이 진짜냐?’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역시 그 때 예수님이 어떤 답변을 하셨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분명 혼란이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수결에 원칙에 의해서 요한 혼자보다는 세 명이 말한 것이 더 확실하고 맞지 않겠는가라는 답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답변을 하셨는지 정확하고 사실적인 것을 가려내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고 알려주기 위한 역사 편찬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에 대해 계시하기 위해 주어진 진리의 책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계시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 되신 참된 그리스도를 바르게 분별하고 그분만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저자들은 각자 같은 사건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도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신이 깨달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라고 되묻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유대인의 왕으로 보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대해 한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대해 빌라도는 35절에서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가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유대인이 아니니 네가 유대인의 왕이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으니 다만 네가 무슨 잘못을 해서 여기로 끌려 왔는지만 말하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지은 죄가 어떤 것인지 밝혀내서 처벌만 하면 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라도를 두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행여 현재 우리들의 신앙이 바로 이 빌라도와 같은 수준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으면서도 예수님이 왕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어떻든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온 분이라고 해도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니까 예수님과 연관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일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유대의 총독으로서 일을 잘 하는 것이 자기 신상에 좋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소 사건에 대해 일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의 생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서 말한 생명은 하늘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은 죄인으로서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신자들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신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함을 보며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벗어나서는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됨을 깊이 자각한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오로지 생명을 볼 뿐입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하게 되는 것은 생명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직무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처럼 예수님이 죄가 있는가 없는가 만을 살필 뿐입니다. 유대교의 총독이라는 자기 입장에서 예수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역시 현재 처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빌라도와 같은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보이기보다는 자신을 도와주고 이롭게 해줄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잘못된 관계인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이러한 잘못에 처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 말하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뿐입니다. 내 입장이 이러니 나를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것은 분명한데 나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람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신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 서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서 세상나라의 일을 구하고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관심은 세상 속에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서 보여 지는 것은 세상 나라의 모습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나의 왕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잘못됨입니다.

신자의 나라는 분명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새로운 나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 나라에 처한 입장을 고수하며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과 죄인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여전히 예수가 왕이나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증거하러 왔다고 말씀하고 진리에 속한 자만이 예수님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 가르쳐 달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 그까짓게 뭐냐?’는 식의 조롱의 말인 것입니다. 즉 빌라도에게는 진리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교의 총독이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진리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위해 유대인의 요구를 들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예수라는 한 사람보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이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진리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진리는 무엇입니까? 혹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반응하는 빌라도가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자리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진리를 원하고 진리를 사모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에게서 불의함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참된 신자인가는 여러분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바라볼 것은 천국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리이며 이 진리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