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강) 요한복음 19:1-16 예수님의 십자가

<본문>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 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요한복음 19:1-16)

<설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기독교 자체가 잘못될 수밖에 없고 신앙 역시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종교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가 십자가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대다수의 신자들은 십자가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은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에 대해서는 금방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얘기를 또 언급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 소위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에게서 흔히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이상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로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음을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 전해지면 쉽게 식상함을 느끼고 관심이 멀어지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의 입술로 고백을 하면서 사랑하는 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사랑하는 분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관심이 멀어져 있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현대 교회는 예수 얘기보다는 자신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가령 믿음으로 자신이 잘된다는 얘기에 더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 얘기 보다는 교회 얘기에 더 관심을 두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하나의 간판이나 장식에 불과할 뿐,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 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신 현장임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해서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진심으로 알게 된 신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을 유일하신 참된 신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것이야 말로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간증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다만 십일조나 주일 성수와 같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복을 주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만나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하게 그런 하나님은 가짜일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19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내용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으로 출발하여 그동안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신 행적으로 더듬어 오면서 예수님이 증거하시고자 했던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내용까지 온 것입니다.

어쩌면 19장부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들이어서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넘어가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를 아는 자는 십자가에서 필히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십자가에서 어떤 하나님을 만났으며, 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알고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먼저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과 빌라도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게 하실 계획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겉도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과 빌라도가 십자가의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과 빌라도의 횡포에 대해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 했습니다. 4절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박아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빌라도를 몰아 붙였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빌라도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놓아준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나 같으면 놓아 줬겠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강압에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것은 유대인의 총독이라는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못박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킬 것이고, 결국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추궁을 염려하여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빌라도와 같지 않다면 그 모습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빌라도의 행위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은, 그것으로 세상의 악이 드러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 말한 예수님의 죄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늘로서 왔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능력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그동안 그들이 품고 살아온 소망을 포기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다릅니다. 빌라도에게는 유대인과 같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못박은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재의 자신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유는 혹 예수라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신의 아들을 심문하고 사형을 시킨다면 신의 모든 저주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로서냐’라고 물으면서 예수가 진짜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에 대해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고 경외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대한 유대인과 빌라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볼 때 아들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아들에 대해 복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저주로부터 피하자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미칠 화를 고려해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유대인과 빌라도의 모습이 현대 교인들에게서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신을 위해 복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종하지 않았을 때는 자신에게 미칠 화를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유대인과 빌라도를 통해서 드러난 죄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가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날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악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만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하나님께만 복종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은 지금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만 섬길 것을 말하면 내심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예수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소망과 나의 꿈을 버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흘리신 피는 내가 흘려야 할 피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피로써 죄 용서함과 함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의 은혜를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욕심을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얻고, 거기에 세상의 복을 보너스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의 반발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피의 은혜를 말하고 구원을 말할 때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가도, 세상의 복과 상관없이 오신 예수님을 말하면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좋지만 내 육신에 도움을 주지 않는 예수는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유대인이며 빌라도의 속성입니다.

눅 23:34절에 보면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나 살기 위해 말씀을 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면서 ‘저들을 사하소서’라고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곧 예수님을 죽인 악한 자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잊어버립니다. 1절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5절에는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고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자색 옷을 입으심으로 우리가 의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결과로 주어진 은총이며 복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며 장차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사모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함을 발견하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그 날을 사모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