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강) 요한복음 19:14-16 유대인의 신앙

<본문>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 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요한복음 19:14-16)

<설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율법문제로 인하여 많은 시비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으로 인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시비를 받았고, 음식을 먹을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정결 문제에 대해 시비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요한복음 9:16절에서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부인하였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기준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때문에 신앙의 척도인 율법도 지키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로서 온 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마 5:17절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율법은 완전했습니다. 즉 불완전한 율법을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한 것으로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셨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이것은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이해로부터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허물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악된 인간이 완전한 율법이 요구하는 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로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열성과 믿음과 의지로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들을 의로운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한 하나님의 백성 됨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완전의 의미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율법을 소중히 여기고 잘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로 인해서 율법이 오히려 무너지고 잘못 오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않고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즉 안식일 규례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고 안하는 것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생각해 보면 신앙의 많은 부분들이 옛날 유대인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참된 것을 찾아가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참된 것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진리를 찾아가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날이 유월절 예비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 예비일에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소경이었던가를 말해줍니다.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아주 중요한 절기입니다. 31절에서도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안식일은 유월절의 안식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해서 믿는 자는 생명에 믿지 않는 자는 사망에 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유월절은 바로 이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과 바르지 않은 집으로 구분하여 피를 바른 집만을 살리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생명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유월절이고 신약의 십자가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구약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유월절 예비일에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월절에 대한 유대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유월절에 대해 어떤 오해를 했습니까? 출 12:21-25절에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여기 보면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을 규례로 삼아라고 말씀하는 것은 어느 한 날을 지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규례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즉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영영히 규례로 삼아야 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산 것은 어린양의 피 때문이다’는 것을 영영히 잊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것을 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월절이라는 날을 크게 여기고 유월절의 어린양은무시해버렸습니다. 즉 그들은 유월절이라는 절기만 지키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참된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죽여서 자신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월절 예비일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신앙이며 오늘날 믿는다고 자처하는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신앙이 곧 이런 식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큰 날로 여기고 그 날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는 신앙으로 여긴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신앙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신앙은 어린양의 피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피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피를 본다면 자신의 죄에 애통해 하면 결코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무엇인가를 행하고 지키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곧 유대인의 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월절을 큰 날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못박아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유월절에는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어린양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가 없이도 얼마든지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아무리 유월절을 지킨들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유대인의 신앙이 현대 교회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신앙이 유대인의 신앙처럼 예수님을 보지 않는 잘못된 신앙이 아닌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을 명하신 하나님의 규례에 이스라엘이 복종한다면 그것은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얻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복종이 있는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주일 하루 예배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날을 정하여 모이고 기도하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유대인처럼 어린양의 피의 의미가 사라진 채 모양과 형식만 남아 있는 빈 껍질의 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어린양의 피를 바라보는 신자는 자신의 의를 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은혜의 열매로 여길 뿐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방해하는 여러분의 적은 바로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유대인처럼 ‘나는 이것을 행하고 이것을 지키고 있으니 저 사람보다 믿음이 좋다’라고 여기는 자기 의가 바로 여러분의 구원을 방해하는 적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의를 잊어버리게 하는 가장 큰 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대적과 날마다 잘 싸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승리는 예수님의 피에 있음을 믿으며 예수님께 감사하고 사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앙은 열심히 지키고 행하는 자신을 보는 것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