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강) 요한복음 19:17-22 유대인의 왕

<본문>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한복음 19:17-22)

<설교>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면서 패를 써서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패에 기록된 글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19절을 보면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도가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 놓은 것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항변합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왕이라고 한 것이지 자신들의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22절)고 답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은 당연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온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인정을 했기에 ‘나의 쓸 것을 썼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설사 빌라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을 했다 해도 빌라도에게는 유대인의 왕일 뿐 자신의 왕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예수가 왕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복종해야 할 분으로는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에 대한 백성의 바른 모습은 복종입니다. 이것이 왕을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 아래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은 비록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십자가에 대해 수많은 말을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안다고 자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십자가에 기록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에 대해 관심을 두신 적은 있습니까? 패야 있든 없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고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든 말든 그것 역시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것이 유대인이 아닌 현 시대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곧 빌라도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쓴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의 글은 분명 거짓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왕으로 오신 분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8:36절에도 보면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따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이 왕으로 존재하시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빌라도는 패에다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지만 그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따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왕도 따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눈에 예수님은 왕이면서도 왕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를 받고 초라하게 죽어가는 한 인물로만 비춰졌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자신들이 소망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룩해줄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왕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염원하는 나라를 결코 이뤄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왕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에 있습니다. 왕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복종이 없다면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서 십자가에 달아 놓는 빌라도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 우리 왕이여’하고 아무리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그것으로 예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백성이라는 뜻인데, 백성이라면 왕에 대한 복종은 필수적인 것인만큼 예수님에 대한 복종이 있는가를 깊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복종이란 왕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는 왕으로서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나라를 열고 닫는 권세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에 들일 자는 들이고 쫓아 낼 자는 쫓아내는 권세가 왕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공로와 행위로 천국을 들어가 보려고 하는 시도를 감히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만큼 이것을 아는 백성이라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릴 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죽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백성인 유대인은 달리 존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그분 앞에 복종합니다. 그분의 모든 것에 대해 순종을 합니다. 세상의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가까이 하시고 함께 하신 예수님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곧 세리요 창녀이며 죄인임을 아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진정한 예수님의 백성이며 참된 유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달리 다른 세상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세상을 두지 마시고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그 나라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이 나라를 원하신다면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결코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자칭 왕이라고 떠드는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유대인들 앞에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데 홀로 ‘내가 왕이다’고 소리치는 정신이상자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복종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자칭 왕으로 떠들고 다니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복종하십시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으면 예수님만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공로와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와 공로를 믿으며 사는 것이 복종입니다.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복종이 있는 그들이 곧 참된 유대인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왕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