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강) 요한복음 19:23-27 십자가의 하나님

<본문>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한복음 19:23-27)

<설교>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 아래서 군병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3-24절의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말한 것처럼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눠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아래에서 있었던 군병들의 행위는 여러분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대개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서로 나누는 일들도 마지막에는 옷까지 빼앗기고 벌거벗겨져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옷까지 빼앗기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저는 군병들의 모습에서 현재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군병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눠 가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고급 천으로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새 옷도 아닐 것이고 다 낡아빠진 볼품없는 옷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옷을 군병들이 무엇 때문에 서로 나눠 가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대단한 분이었으니까 기념으로 보관하기 위해서 나눠 가지려고 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억측일 뿐입니다.

성경은 군병들이 옷을 나눠 가지는 것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24절의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일에 대해 미리 예언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배후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4절의 이 구절은 시편 22:18절의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알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외치신 그 말씀이 이미 시편 22편에 서 등장하고 있고, 또 22편의 내용을 보면 모두가 고난과 연관되어 있으며 22:18절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해 보면 22편은 예수님이 대해 미리 예언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곧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메시아임이 증명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경에 계시된 모습 그대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장차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하늘로부터 온 메시아라면 예언된 모습 그대로 오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온 세상이 흠모하고 영웅으로 대접할만한 인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영웅이었으며 자신들이 흠모할 만한 위대한 모습의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도외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시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는 예수님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인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시편 22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생각 밖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려움에서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고 외면해 버리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은 자신을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처럼 대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10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상함을 받으시고 질고를 당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하나님을 원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상함을 받지 않고 질고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상함을 받게도 하시고 질고를 당하게도 하신다’라는 말을 한다면 달가와 하겠습니까? 분명 그런 하나님은 거부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우리의 생각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계시한 그 모습 그대로의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역시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모습들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고, 지금까지의 생각에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실제로 다윗의 옷을 벗기고 나누고 제비뽑아 가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에게 그러한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고난과 어려움에서 돕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르짖음에 대해서도 듣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독생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하셨던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십자가는 부지런히 말하되 십자가 위에서 살아가는 삶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멸시를 받고 죽으시는 고통과 어려움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물론 죽으신 예수님이 결국 부활했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죽음은 회피하고 부활만 소유하려고 합니다. 마치 빵을 먹을 때 맛없는 부분은 골라서 버리고 팥이 들어있는 맛있는 부분만 골라서 먹는 잘못된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잘 믿으면 예수님이 자신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특별히 대우해서 세상에서 높여주는 그러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사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이 있음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고, 세상을 심판받을 땅으로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히 원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환경이나 형편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는 멸시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냥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침묵하셨지만, 그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도 받으셨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나서시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과 어려움에 빠짐으로서 도와달라고 열심히 부르짖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냥 침묵하시고 도와주시는 흔적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과연 어떤 마음이 되겠습니까? 아마 맥이 빠지고 ‘신앙이 뭔가?’ 실의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볼 때 침묵으로 보일 뿐,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부르짖고 애원을 해도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침묵하시는 것으로, 마치 아예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이 우리를 도우시고 복주는 것으로 행하여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모두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되어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성공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할 것이고, 재물에서 하나님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말씀 안에는 이들이 원하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적과 세상의 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들을 죽이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신자는 필히 십자가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게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에게 득이 되는 사건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계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행하면 복준다’는 말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장 초라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만이 여러분을 생명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