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강) 요한복음 19:28-30 다 이루었다

<본문>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28-30)

<설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친 일곱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 누가와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과연 어느 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냐?’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이 복음서마다 각각 다르게 기록된 것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자신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잘 나타내주는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을 알려주는 역사책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들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도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믿으면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건과 사실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모든 복음서가 비록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모든 사건들이 똑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복음서를 한권으로 통합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복음서가 각각 나뉘어 있는 것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님이 각기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다른 복음서의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기록한 것도 이 말씀이 요한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아주 증요한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일의 완성을 뜻합니다. 완전한 성취를 의미합니다. 일의 완성이고 완전한 성취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를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태한 백성들의 구원과 연결된 것입니다. 따라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성도의 완벽한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더 이상 보태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완벽하게 성취된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무는 사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이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앞에서 ‘예수님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라는 말이 허용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으니까 행해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원 받음의 결과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행함이 없으면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며, 또한 구원의 결과를 행함에 둔다면 몇 가지의 행함이 기준이 되어서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함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았으면 행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 행함이라는 것이 착한 일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함은 종교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겠습니까? 구원받은 자로서 행하는 것이라면 구원 받은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함이 종교를 초월해서 보여진다면 구원받은 자의 독특한 행함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6:53-54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으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증거물은 인자의 살과 피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에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의미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용해서 천국가려고 하지 말고 신자 또한 죽은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천국가게 되었습니다 .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싫어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하는 신자, 그가 곧 생명을 얻은 자라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하는 능력이지 착한 일을 하게 하는 힘은 어닌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겠습니까?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주님의 길을 가겠습니까? 하지만 믿음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증거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으로 생명의 증거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에 대한 모든 것은 완벽히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완성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리는 것이지 뭔가 다른 것을 보태서 좀 더 멋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얻은 증거물로 다른 조건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자로서 있어야 할 행위라면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고 기뻐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받고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은 조바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루셨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도 보탤만한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인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 행위로서 구원을 멋있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결과를 행위에 두게 되면 결국 행위가 없을 때는 ‘내가 혹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과 의심과 조바심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행위란 신자가 믿음에 이끌려 살아가게 되면 자연히 드러나게 되는 열매입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입히고, 자신의 편함을 위해 이웃이 힘들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행하려고 하기보다는 무엇이 믿음인가를 살피면서 자신의 길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써 불의한 내가 의롭다 여김 받게 됨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가 불의한 나를 의의 세계로 초청했음을 믿는 자라면 자신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의의 의미를 두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행위를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행위와도 비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믿음의 독특한 현상입니다.

교회가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라면 주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가르쳐야 할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됩니다. 교회 역시도 교회가 끊임없는 유혹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어둠의 세계에 빛이 비친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둠의 세상은 빛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세상이 한 일은 빛으로 오신 분을 죽인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에게 오히려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으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사실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흔적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