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강) 요한복음 19:31-37 구원의 근거

<본문>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한복음 19:31-37)

<설교>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다음날이 유월절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들의 거룩한 큰 날에 죽은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을 것을 요구한 것은 당시 사형수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관습에 의한 것입니다. 이들에 요구에 의해 군병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33절). 대신 한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과연 이러한 내용들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 그 시신에게까지 손상을 입히는 인간들의 악함에 대해서 말하고자 함일까요? 물론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인간의 악함이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단지 그런 차원으로 이해하는 데는 뭔가 부족함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두고 볼 때 선뜻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군병들이 예수님의 다리만 꺾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군병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을 알고 그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다리를 꺾는 것은 죽지 않은 죄인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죽은 죄인의 완전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여부와 상관없이 다리를 꺾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옆구리만 창으로 찌른 것입니다.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면 같이 달린 강도들에게도 같이 행하는 것이 옳은데 왜 예수님만 그러했겠습니까? 사실 당시 군병들의 마음에 대해 성경은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성경은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하셨다는 것입니다.

36-37절을 보면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뼈가 꺾이우지 않는다는 성경과 찌른 자를 보리라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분명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자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리를 꺾이지 않게 하시고 대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게 하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듣는 것이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이유가 될 것입니다.

먼저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내용은 시편 34:20절에 있습니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는 이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은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이루심으로써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시편 34편을 보면 그 전체 내용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건지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편 34:20절을 대한다면 하나님이 그 뼈를 보호하는 자는 의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군병들이 유독 예수님의 다리만을 꺾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뼈를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시편 34편의 내용을 배경으로 해석하면 결국 예수님은 ‘의인’이라는 답을 내리게 됩니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죽였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오직 예수님 한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9:12절을 보면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에 희생 제물을 먹을 때 뼈는 꺾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 역시 시편 34편을 배경으로 해서 생각해 보면 희생 제물이 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뼈를 보호하심으로써 유대인이 죽인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오신 의로우신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신 또 한가지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입니다. 이것은 스가랴서 12:10절의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내가 찌른 그 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위해 애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면 신앙에 열심이 생겨서 교회 일에 더욱 부지런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찌른 분을 바라보고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그분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찌른 자라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내게 부어졌기 때문이며, 내 죄를 알게 되고 애통하게 되는 것 역시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게 하심으로써 지금 죽으신 예수님이 죄인된 자를 위해 보내신 의인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게 하신 것은 바로 너희가 의인을 찌른 자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간구하는 심령을 받은 신자라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구할 뿐입니다.

시편 51:8절에 보면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지은 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51편의 내용은 전체가 죄에 대한 자복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회개를 보면 단지 ‘하나님 네가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는 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대개 회개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무작정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다윗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이 목적이기 보다는 죄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의 내용 중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입니다.

뼈를 꺾는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뼈를 꺾는 것처럼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죄와 연관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이며, 죄와 연관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제물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이 죽이시는 제물의 희생을 보고 즐거워하게 기뻐하게 해달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물의 희생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희생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에 대한 기쁨이고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물에 대해서는 자신의 죄로 인해 희생을 당한 것에 대한 애통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다리를 꺾는 일도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며,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발견하며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죄로 인해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리를 꺾도록 놔두는 것이 옳은데 왜 꺾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죄인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의인으로 죽으셨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한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도록 하셨습니다. 찌른 자를 본다는 것은 내 죄를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곧 예수님을 찌른 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진 심령을 가진 신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찌른 자를 보지 못합니다. 설사 본다고 해도 전혀 잘못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에 시비를 걸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교회 일에 등한시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찌른 자로 보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찌른 자로 보게 되면 결국 교회 생활 잘하는 나는 예수님을 찌른 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찌른 자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스가랴서 12:10절의 말씀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부은바 된 심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 동요와 분위기에 의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죄에 대해 애통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애통함은 나의 죄로 인해 의인이신 예수님이 죽으셨음에 대한 신자의 반응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애통함이 있는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에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찾으며 세상의 것을 구한다면 그는 자기의 죄도, 예수님의 죽으심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도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자의 구원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그 어떤 조건도 구원의 근거에 끼어 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나를 더욱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성경을 무시한 착각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위 덕분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린 다만 예수님을 찌른 자에 불과합니다. 죄인이 의인을 찌릅니다. 그러데 그 의인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찔렀음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로서 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주어진 이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마시고 날마다 누리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기 행동의 무게를 달아보면서 구원을 염려하고 의심하는 어리석음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