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강) 요한복음 19:38-42 예수님의 장례

<본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한복음 19:38-42)

<설교>

십자가의 말씀이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바울은 이들을 두고 전자를 구원을 받는 사람으로 후자를 멸망하는 자들로 구분합니다(고전 1:18).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멸망하느냐는 인간의 어떤 조간이나 자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놀라운 기적이나 표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고 하신 말씀이나 메시아라고 하신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악의 정체를 폭로시킨 것입니다.

세상의 악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조차 자신의 힘의 수단으로 삼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힘을 얻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다만 자신들의 죄를 속하여 천국으로 가게 해주는 속죄 기능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즉 속죄는 속죄대로 챙기고 세상 것은 세상 것대로 챙기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그리스도를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도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4).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의 힘이나 자질을 보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 진다’는 이것이야 말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신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무엇 하나도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은 죽으신 예수님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단순히 예수님의 장례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례한 충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도 아님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38절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말합니다. 먼저 38절의 말씀에서 요셉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데, 그는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던 사람입니다. 은휘라는 것은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숨겼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과연 무엇을 숨겼다는 것입니까?

마태복음에서도 요셉에 대해 말하는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셉은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요셉이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숨긴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셉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지를 못하고 숨겼을까요?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요한은 요셉에 대해 예수님의 제자라든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자라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긴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 예수님의 장례에는 요셉과 더불어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니고데모에 대해 “일찍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39절)고 말합니다. 예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올 때 밤중에 몰래 찾은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때도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자신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밤중에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점을 언급하면서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한 것을 말하면서 요한은 동일하게 요셉과 니고데모의 신앙의 연약한 모습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심이 될 것입니다.

요한이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 자로 말하는 이유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셨기에 인간의 능력은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믿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되어짐을 말씀하는 것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임을 생각해 보면, 요한이 요셉과 니고데모를 신앙에 연약한 자로 말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장례합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흔히 요셉과 니고데모의 예수님에 대한 봉사를 말하기도 하지만, 요한은 이들의 봉사를 소개하려고 본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당시 상황은 아주 험악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벼르던 예수를 죽였습니다. 빌라도는 싫지만 억지로 예수님을 사형시켰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백 근의 침향과 몰약을 가지고 옵니다. 백 근이면 약 33키로 쯤 되는 무게인데 이 정도의 양이면 몰래 숨겨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모든 유대인들 앞에서 드러내 보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요셉이나 니고데모였다면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겠습니까? 결국 지금의 요셉과 니고데모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요한은 요셉과 니고데모의 연약한 신앙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뒤바뀐 모습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실제 활동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감추던 이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사람으로 바뀐 것이 이들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십자가의 능력의 결과임을 요한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 신자라면 무엇 하나도 ‘내 힘으로 했다’는 교만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행동과 신앙을 과시하는 외식과 거짓말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진심으로 ‘나는 무능력할 뿐이고, 만약 되어진 것이 있다면 전적으로 십자가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요한은 지금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세우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으며 무슨 힘이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복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장한 사탄의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지혜로 주신 것이지 우리의 일을 이루는 힘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믿음을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한 힘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그러한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기적과 표적으로 도우시는 다른 예수를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쏟아지는 크나큰 은혜를 값없이 받아 누리며 다만 감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받기 위해서 뭘 하겠다거나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항상 신자는 주님 가신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 길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신자를 붙들어서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연약함에서 두려움이 없는 강한 신자로 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스스로 강해지려고 애쓰려고 하기 보다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의 능력은 여러분은 강하고 담대한 주의 백성으로 세상에 세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