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강) 요한복음 20:1-10 믿는 것과 아는 것

<본문>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요한복음 20:1-10)

<설교>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이미 수많은 세월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시면서 많이 들었던 것이고 또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고 굳게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내용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 있는 저로서는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설교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대다수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부활절이나 또는 부활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할 때에는 부활을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여러분에게 ‘부활을 믿자’라는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드릴 때면 항상 부활이 무엇이며 부활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여러분 스스로 자기 믿음에 대해 점검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확인이나 확신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부활 역시 내가 알고 있는 부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활 신앙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관없는 부활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 역시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은 무덤에서 옮겨져 있고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놀라 돌아와서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이 사실을 고합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무덤을 달려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리아의 말대로 무덤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만 남아 있던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에서 대개 생각하는 것은 ‘부활의 확실성’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기에 부활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내용이 아닙니다. 비어 있는 무덤 또한 부활의 확실성을 말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어떤 물증을 통해서 믿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물증을 가지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창조도 노아 홍수도 그리고 자연을 초월한 수많은 기적들까지 어떤 물증으로 인해서 확신을 가지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으로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빈무덤으로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9절을 보면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무덤을 찾아온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이들은 비어 있는 무덤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의 ‘믿더라’는 단어의 의미가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합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마리아가 무덤이 비었다고 알려준 것 때문에 무덤으로 온 것이니 결국 마리아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9절의 내용이 부활에 대한 것임을 생각해 보면 8절의 ‘믿더라’는 말은 부활과 연관된 것임이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믿었는데 9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부활을 믿게 된 제자에게 부활을 알지 못하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활을 믿기는 하나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8,9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부활을 믿으면서도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한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 우리 자신의 상태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하여 부활에 대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도 부활을 알지 못한 수준에 있는 것이 우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신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제자들이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성경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9절을 보면 성경 어딘가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사실 9절의 내용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16:10절의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는 구절을 보면 9절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내용은 이미 죽은 자를 죽지 않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자신이 다시 살 것을 믿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유대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 한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즉 다윗이 부활을 믿었으니 우리도 부활을 믿자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윗의 부활 신앙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존재안에서의 신앙이었음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으면 부활한다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러니 비록 그들이 부활을 믿었다고는 하나 부활은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대개 예수님의 부활을 장차 부활할 우리들에게 미리 시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날 봐라 내가 부활한 것처럼 너희도 나중에 부활할 것이다’는 식으로 미리 부활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부활을 믿기는 하나 부활을 알지 못한 유대인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이 현대인들을 단지 종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나처럼 하면 너희도 부활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너희는 결코 생명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죽으심을 통해서는 우리가 곧 죽어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셨고, 다시 살으심으로는 생명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아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의 삶에 있다면 그것이 곧 부활을 믿지만 부활을 알지 못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부활했으니 나도 부활한다‘는 막연한 기대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생명이라는 굳은 믿음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날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에 불이익이 올 수 있는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말씀에 복종하는 길이라고 여겨질 때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아는 자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다만 믿음만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입니다. 삶을 주님께 드리지도 못할뿐더러 주님을 위한 삶에서도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 없이, 주님을 위해 포기한 것 없이 다만 자기 이익을 기대하며 주님을 추종하고 있는 수준일 뿐입니다. 부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자기 죽음이 없이 다만 다시 산다는 것이 좋아서 믿는 것이 전부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중심의 사람은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잘될 때는 좋다 하고 주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는 예전의 은혜는 모두 잊어버리고 대신 원망과 불평으로 자신을 채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중심의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다스리는 결과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일이 안된다고 해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안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찾기를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아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시범이 아닙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너희는 나에게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아는 자는 ‘나는 부활한다’가 전부가 아니라 ‘나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느 수준입니까? 그냥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부활한다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신앙에는 힘이 없습니다. 부활은 놀라운 능력이며 힘입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 신자로서 힘이 없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으나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도 못한 채 믿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믿음도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전에 먼저 부활을 아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라는 것으로 부활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신앙은 여러분에게 큰 힘과 능력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가 않은 것은 놀라운 힘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