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강) 요한복음 20:11-14 마리아의 울음

<본문>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요한복음 20:11-14)

<설교>

안식 후 첫날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막아 놓은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처럼 땅을 파서 매장하는 방법이 아니라 굴에 시신을 안치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굴의 입구를 돌로 막은 것이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이 치워졌다면 그것은 무덤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덤이 외부인의 침입을 받았음을 뜻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고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본문은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있었던 마리의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마리아는 제자들이 돌아가자 울면서 무덤을 들여다봅니다. 마리아가 우는 이유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시신이 없다는 것이 울일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에게 시신이 사라진 일은 시신을 도둑맞은 경우가 되겠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경우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시신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신이 없다는 것은 곧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것인데 마리아가 울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전혀 생각지를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다시 사실 것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울면서 무덤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인해 운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깊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리의 감정과 느낌에 국한 된 사랑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예수 자체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고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지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죽은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 즉 예수에 대한 감정이며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으면서도 예수를 사랑한다고 떠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자신의 느낌일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남기신 진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생각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신앙, 이런 사랑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상관없이 내가 예수님을 생각해 줌으로써 자신은 예수를 믿는 자고 생각하는 정도를 두고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 가지 현실에서 마리아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낙심하고 슬퍼하고 염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신자는 피로써 맺어진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가 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이 감사함으로 남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단지 주님을 생각해 주는 것으로 사랑한다 믿는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신자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당시 무덤 안의 광경입니다. 마리아가 무덤을 들여다봤을 때 무덤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왜 우는가 물어 봅니다. 이것은 우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울 필요가 없는데 울고 있는 마리아를 책망하고 깨닫게 하기 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울 필요가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다시 생존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에 처한 우리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는 모습은 속죄소를 생각하게 합니다. 속죄소란 법궤를 덮은 뚜껑을 의미합니다. 시은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떼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와서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에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소의 뚜껑 양 끝에는 두 그룹, 즉 천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덤에 천사 둘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던 곳의 양 끝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무덤의 광경은 구약의 속죄소의 모습을 그대로 실현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덤의 광경은 죄인으로서 죽어야 할 자들이 어린양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죄를 용서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도 부활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자신과 어떤 연관있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만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부활은 생각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예수라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리아의 수준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내 알바 아니고 나는 다만 예수님이 내 일을 잘 도와서 잘되게 해주면 된다는 식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서 예수님이 없다는 것 때문에 웁니다. 자기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낙심하는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시신이 있다는 것은 죽음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고 시신이 없는 것은 죽음의 세계를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세계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 가지를 못하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신자가 바로 이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리를 염려로 끌어가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바로 이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든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울음이 없고 절망이 없습니다. 다만 기쁨이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