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강) 요한복음 20:14-16 예수님의 물음

<본문>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요한복음 20:14-16)

<설교>

신앙의 문제이든 예수님을 사랑하는 문제이든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앎과 이해로 나타나고 증명되는 것이지 내 쪽에서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주고 내 정성과 내 마음을 보여주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이 부분에 대한 착각과 잘못됨에 깊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현대 교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과 신앙을 내 쪽에서 보여줘야 하고, 그것은 나의 실천과 행함에 의해서 증거 되어 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예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채 자기 신앙에 자기 스스로 취해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린 이러한 모습을 지난 시간 마리아의 울음을 통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울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깊은 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습니다. 평소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으니까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거나 관심도 없었다면 예수님의 무덤에 와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시신이 없어진 것 때문에 울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신이 없는 것으로 애타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으로 보기 때문에 고난 주간에 소위 정사일이라고 하는 금요일에 하루 금식을 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들을 신앙이나 사랑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더욱 깊은 사랑인 것으로 오인하고, 금식을 하지 않는 것보다 금식 하는 것이 더 높은 신앙인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곧 신앙과 사랑에 대한 큰 자기 착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현대 교회는 ‘예수님을 신앙하자’는 말을 하기 전에 ‘신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전파해야 할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비록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우는 모습이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이나 사랑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완전 무지에서 보여지는 비신앙일 뿐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하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시신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기쁨이고 희망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다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주어질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깊은 정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영생과는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물음은 천사들도 물었던 것이지만 이 물음이 마리아가 우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말은 분명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은 마리아가 울 필요가 전혀 없는데 울고 있는 것에 대해 다소 책망이 섞인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하여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마리아에게나 오늘 마리아의 신앙 수준에서 맴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마리아를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다니는 그 상태로 그냥 두었다면 나중에라도 시체가 없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설령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구원과 상관이 없는 자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으셨다는 것은 희망이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리아를 예수님이 붙드시고 책임지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역시 마리아의 수준에서 울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울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각자의 삶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해 우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실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면 울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고 나를 책임지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운다는 것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란 내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믿는다면 자신의 상황이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에서는 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울음이 멈추지 않는 삶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울면서 예수님을 찾고 도와 달라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일을 겪든 무관심하게 있다가 도와 달라고 외치면 그때서야 도와주는 분이 아닙니다. 또는 도와줄 준비를 하고 계시다가 간청을 하면 비로소 달려와서 도와주는 그런 예수님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요구를 하고 어떤 반응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기 위해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도우심이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로 인해서 주어지는 영생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이나 형편에서 도우심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울고 있는 연약한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를 붙들어 하나님 백성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역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도우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의 신앙은 어느 한 순간도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지탱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탐욕과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으로 가득찬 우리의 악한 심령으로 어떻게 믿음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의 능력이고 도우심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어떤 일에서든 염려할 것도 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마리아의 울음이 더 이상 울음으로 지속되지 않도록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울음을 기쁨으로 바꾸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도우심입니다.

부활을 알고 있는 우리들 시각에서 마리아를 보면 분명 마리아의 신앙은 엉터리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오라비인 나사로가 살아가는 것을 목격을 했으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무지한 마리아는 분명 신앙이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리아를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리아도 예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아는 백성으로 고쳐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고치심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극히 삼가야 하는 것은 믿음에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판단치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엉터리 같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붙드시고 인도하실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사망이 다스리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신이 없는 것으로 우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이 시간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집 세고 완악한 우리에게도 찾아오심으로써 주님을 알고 주님의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음을 생각함으로써 믿음에 절대로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랑할만한 신앙도 없음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3: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에 연약한 모습만 보여주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든든함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를 정죄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 앞에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체 모두가 함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고치시고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연약한 믿음을 도우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