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강) 요한복음 20:16-18 새로운 관계

<본문>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한복음 20:16-18)

<설교>

시신을 찾아다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처음에는 동산지기인줄로만 알았다가 예수님이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까 그때서야 ‘선생님이여’라고 답합니다. ‘선생님이십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중점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생각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마리아와는 격이 다르기 때문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육체는 살아있는 인간의 육체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있고 또 그러한 생각이 극히 타당하게 보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이 똑같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른 성경의 기록으로 인해 차질이 발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8:9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마태는 마리아를 포함한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경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몸이 인간이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는 추측은 신빙성이 없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린 바가 있지만 성경이 이처럼 한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르게 말한 것 때문에 우리는 많은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되 일률적으로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로도 오셨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희년의 성취자로 오신 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저자들이 각기 자기 시각에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인해서 같은 사건이 다르게 기록되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사실적인 역사냐?’라는 면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17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이지만, 도대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신 것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질 수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그 뒤의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내 형제란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제로 관계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관계가 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곳은 본문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형제로 불려지는 새로운 관계, 예수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신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진노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는 귀한 축복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부름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함이 있습니까? 아마 그러지를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전 본래부터 나의 아버지고 나의 하나님인 것으로만 알고 있지,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부를 수 없는 진노의 자리에 있는 멸망의 자식이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관계와 신분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소생, 즉 목숨의 연장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존재로 만드는 놀라운 부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비록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알아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입니다. 부활을 모르기에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마리아의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이 마리아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쪽에서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는 들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생명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해서 무조건 믿음이 아니며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요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마리아의 수준을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모른 자였습니다. 만약 당시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한다면 마리아는 부활의 의미도 모르면서 영생을 얻은 자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몰랐기에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붙들고 예수님을 아는 자로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마리아의 수준에 있으면서 ‘나는 예수님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수준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예수님의 모든 일의 의미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필히 ‘내 양심과 내 도덕과 윤리 행함으로는 결코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질 수 없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이루어진 하늘의 생명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 그런 상태에서는 부활의 세계에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는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쪽에서 손을 내밀고 정성을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있게 된 신자는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공로만 의지할 뿐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생명의 활동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자신을 위해 활동합니다. 자기 세계를 위해서 자신의 유익과 자기 탐욕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구축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신앙도 인간의 유익과 탐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종교 세계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버리고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사고방식이 아닌 하늘의 생명의 활동의 증거물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가능해진 것이고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모인 교회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섬김만을 높이고 노래할 뿐이지 인간이 중심이 되어지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아니하면 필히 인간의 탐욕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목사는 자기 탐욕으로 교회를 이용할 것입니다. 교인은 또한 그들 나름대로 교회를 자신의 즐거움의 도구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으로 판단될 뿐입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친분과 정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차원 높은 주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분과 정을 뛰어 넘어 만나는 교회의 관계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생명에 결코 나아갈 수 없는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묵상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에게 내 마음의 전부를 내어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