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강) 요한복음 20:19-21 평강

<본문>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20:19-21)

<설교>

지난 시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하심으로써 보통 사람이 만질 수 없는 신비스런 몸이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아의 수준으로는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주를 본 사실과, 또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전합니다. 따라서 당시 제자들은 주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에 대해 마리아를 통해 전해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말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된 상황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자신들이 언제 유대인들에게 발각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비밀스런 곳에 은신하여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다시 사신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전한 것은 저녁때가 되기 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른 아침에 무덤에 갔었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전한 것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들은 상태에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에 대해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듣고도 여전히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말이 그들에게 전혀 어떤 힘을 주지 못하였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도 제자들과 같은 모습을 얼마든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나 천국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있으며 위로를 얻고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다시 사신 예수님에 대한 말을 듣고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본문의 내용은 연약한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 제자다운 모습을 드러내지를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붙들릴 때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께로부터 도망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제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면서 주님의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며 사랑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신다면 결코 교만이라는 악한 길에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19절 뒷부분에 보면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평강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은, 비록 예수님이 직접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에게 자동적으로 평강이 주입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때문에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겨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임을 갖는 그런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지만 평강이란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 두려워하던 것들이 전혀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상태를 가리켜서 평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많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의 모든 것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위에 영향을 주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서 염려와 걱정도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게도 한다고 생각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0:28절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세상의 힘에 대한 두려움은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분을 생각지 않는 결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강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인사치레의 말도 아니고, 평강이라는 마음을 주시겠다는 뜻도 아니라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대상이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평강을 얻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평강의 상태의 기쁨을 의미하기보다는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살았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의 문제는 예수님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인한 기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님을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쁨 역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으로 인한 것이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다시 사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관심거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가 다시 생겼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한 것이 평강이었다면 21절에서 다시 평강을 말씀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를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의 기쁨은 평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 뒤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 마음과 동일하게 제자들을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이나 삶에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자리로 보내시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천대와 멸시와 고난의 자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태, 어떤 환경과 형편에도 평강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로 이러한 자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보냄 받은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평강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은 내가 살고자 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남들처럼 살아봐야 한다는 욕심으로 인해서 자신이 낮아지게 되고 실패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인생이 끝이고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 때문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세상의 권력자와 힘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제자의 모습과 상이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신 것처럼 보냄 받은 제자다움은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버지의 뜻 아래 존재한다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인생은 분명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책임지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쪽으로 분명히 책임지시고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볼 뿐 세상에 대해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평강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죽는다면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실패한다면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죽음과 실패를 원하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뛰어 넘어서 신자를 해가 되는 쪽으로 끌고 갈 수 없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실패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실패로 밀어 넣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 말로 평강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사망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즉 세상은 결코 예수님의 백성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죄로 인하여 몸의 사망은 필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이 죽는 것은 세상의 권력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에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돈이 없는 것, 실패하게 되는 것, 어느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것이야 말로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주어집니다. 여러분께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