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강) 요한복음 20:21-23 죄사함

<본문>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20:21-23)

<설교>

22절을 보면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 나오고 23절에서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문맥 그대로 이해를 하면 성령 받은 신자에게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권세가 주어졌다는 뜻인데 엄청난 말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우리나라 헌법에 보면 대통령에게 사면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있는 자를 사면해줄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사면권은 죄를 지은 자가 치러야 형량을 사해준다는 것이지 그가 죄 없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죄사함은 죄값으로 치러야할 형량을 없이 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죄없는 자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그러한 권세가 있게 된다니 그러면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누구의 죄라도 사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사실 이러한 본문으로 인해서 많은 사이비와 이단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이비와 이단이 말하는 것은 하나같이 교주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나와야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 해도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 눈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 성령 받음이며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와의 갈등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죄인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죄사함의 권세는 죄없으신 분의 고유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22절을 다시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저희를 향하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내쉬며’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뭔가 예수님께 있는 것을 불어 넣으시는 의미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즉 성령 받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것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있는 것을 죄인된 우리가 공유하기 위해 성령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내용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령은 살아있는 영이라는 뜻으로서, 육신이 뭔가 신비한 체질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며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살기를 힘쓰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존재입니다.

반면에 육적인 존재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도 뜻과 기뻐하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아예 그런 쪽으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관심을 자기에게만 둘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단절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생명에서 끊어지고 육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사 사람이 생령이 된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을 받은 자로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뜻을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성도를 성령받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성령 받은 신자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23절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신 뜻이 죄사함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죄를 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령 받은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신자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주어졌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은 오직 성령 받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때에만 가능한데 피를 믿음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는 죄사함 받은 자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죄사함 받은 신자는 자신의 죄사함에 대해 증거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죄사함을 증거하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결코 한 개인의 구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죄를 사하신 예수님의 일은 나의 구원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일이 세상에 계속 전파되는 것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자가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신자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자기 구원의 보장과 확신으로만 이용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받음이 나의 구원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죄사함을 선포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무엇에 게을리 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나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신자들만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전할 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사함을 얻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죄가운데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성령 받은 자에게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보냄 받았습니다. 누구든 신자가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대해 이러한 권세를 가진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 나약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보는 것을 똑같이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신자됨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나 다니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자 됨이 증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신자만의 권세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과 기쁨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머물 자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머물 자라는 것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신자 된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의 죄사함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든지 받지 않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지런히 전도지를 나눠 주라는 뜻이 아니라 신자로서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정치, 경제, 여러 문제로 인해 불안해 할 때 신자는 그리스도의 죄사함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되어질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에서 다만 그리스도께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을 소망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께 미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세상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이면서 신자에게 주어진 권세를 잊어버리고, 생명의 능력도 없이 교회만 붙들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나약한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믿음을 말하면서도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당당하십시오. 신자는 예수를 파는 사람이 아니라 선포하고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신자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생각하시고 보냄 받은 자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존재하는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