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강) 요한복음 20:24-31 도마의 믿음

<본문>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24-31)

<설교>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알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하늘의 세계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예 하늘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늘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생명나무를 감추시고 아무도 그곳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은 생명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생명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설령 인간이 생명에 대해서 말하고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말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습득한 경험과 상식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이 알려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세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성경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충실하는 그것이야 말로 생명으로 향하는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도움이며,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이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로 하여금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주님만이 구원자시며 주님 앞에서 우리의 재능이나 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성경입니다. 말씀이 확실한 증거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체험적인 기적을 원합니다. 그저 믿고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것으로 여기고 확실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체험을 하거나 꿈에서라도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신의 믿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본문은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24절을 보면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를 못했습니다. 25절을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도마는 지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직접 목격하지를 못하고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전해 듣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입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전달 받고 있지 않습니까?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받고 있는 것이 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의 말을 들은 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못믿겠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요구하는 것은 직접 손의 못자국을 봐야겠고 내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봐야겠고 옆구리에 넣어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즉 직접 확인을 하고 체험을 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마의 이런 모습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불신앙이나 믿음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마처럼 나 역시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 만져보고 확인을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해 믿음이 더 깊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그냥 성경에서 말씀한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몸소 체험한 것이 더욱 더 살아있는 믿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때문에 어쩌면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것보다는 내가 봐야 믿겠다고 나서는 도마가 더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솔직하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별문제입니다.

이처럼 봐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도마와 다른 제자를 차별할 수 있습니까?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보고 만졌지만 다른 제자는 만지지를 못했다고 해서 도마가 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식의 구분을 많이 합니다. 체험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은혜를 많이 받았다 적게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마는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못자국을 만져 보라고 한 것은 도마가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도마에게 오신 것인데 도마가 더 낫다는 말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체험이라는 것이 절대로 자랑거리로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뭔가 체험을 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정도로 완악했기 때문인 것이지 특별히 사랑하거나 더 나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체험을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험을 한 사람이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못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 있기 때문에 너희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부끄럽습니다. 여러분은 저 같은 체험을 하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는데 나는 얼마나 못나고 형편없으면 체험을 줘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까?’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27절에 보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도마에게 직접 손을 넣어 만져 보게 하시는 이유는 도마를 믿음 없는 자로 그냥 두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특별히 도마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도마는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하니까 믿음 있는 자 되게 하시기 위해 도마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보고 믿는 것과 보지 못하고 믿는 것에 차이를 두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즉 보고 믿는 것보다는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 수준이 높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또 다시 ‘체험을 했는가 하지 않고 믿는가’로 믿음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체험을 하는 것이 나은가 안하는 것이 나은가를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은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체험을 하지 못하고도 믿는 자들이 나타날 것인데 그들이 바로 복받은 자들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결과를 자신의 삶에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원하는 것이 기도 응답이라는 체험일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현실에서 차곡차곡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 응답으로 신앙을 싸우는 모습들을 교회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지 않습니다. 같이 기도를 했는데 한 사람은 응답이 되고 한 사람은 안됐을 때 이미 상대방보다 신앙이 낮은 것으로 치부되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 응답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안된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고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마저도 몸의 가시를 인해 세 번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체험을 했든 기도 응답이 있든 없든 그 모든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30-31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만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몇 개만 기록하신 것은 기적의 의미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믿으신다면 별도의 기적이 필요하겠습니까?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데 기적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는 아무 체험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이 도우셨기 때문이고 하늘의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가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 해당되는 것이고 결국 믿음이 있는 그것이 복을 받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봐야 믿겠다는 것은 믿음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믿음이었습니다. 나에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야 믿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세상에 하나님은 하늘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믿음을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누리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체험을 얘기한다 해도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체험이 필요 없는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복있는 신자입니다. 이 복을 상실한 자로 산다면 그는 참으로 신자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이나 엿보는 자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