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강)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본문>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5-17)

<설교>

교회에서 신자에게 강조하는 것의 중심에는 열심이 있습니다. 마치 열심이 없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열심을 신앙과 연관하여 ‘열심을 내라’라는 말을 부단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람들이 듣기에도 매우 타당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열심이 없는 자신의 신앙을 탓하면서 열심을 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 신앙에서 열심을 내는 것이 신앙과 연결되는 것처럼 교회 역시 교인들이 열심을 내면 활발하게 보여지고 그것을 ‘살아있는 교회’로 연결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교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 교회가 살아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신앙이나 교회를 상식선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로 들려지겠지만, 사실은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란 성경에 있는 말만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목사 역시 성경에서 가르치는 있는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국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신앙의 좋고 나쁨은 교회에서의 열심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은 아주 이기적입니다. 내가 편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열심을 내는 반면에 편치 않고 기분이 나쁠 때는 열심을 낼 마음조차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결국 열심이 믿음에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기분 상태와 환경에 의해 결정되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심을 어떻게 신앙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자기 열심으로 예수님을 쫓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열심은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결국 옛날의 직업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열심을 내었으나 무엇 하나 되어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진다’는 말씀까지 들었습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위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만약 평소의 베드로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예수님의 일을 하자’라고 나서는 것이 베드로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다시 옛날 어부로 되돌아 가버린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베드로는 열심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장담을 했지만 자신의 장담대로 예수님을 따르지를 못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또 다시 자기 열심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열심을 빼버리면 신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열심을 주장하는 사람은 열심을 가지고 할 것이 많습니다.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모든 일에 열심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바쁘게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에게 인간의 열심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과연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막막할 뿐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고민만 남을 뿐입니다. 베드로 역시 이러한 상태에서 다시 옛날의 직업으로 되돌아갔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베드로의 열심이나 실력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했더니 그냥 잡히는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앞으로의 삶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되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며 신자로서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까? 이것을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이러한 물음을 하실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원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열심이나 실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그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께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기분 따라 주위 환경과 형편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변덕 많고 믿을 수 없는 우리의 열심을 과연 예수님이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일에 있어서 우리의 열심이 진심으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죽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열심을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항상 내 유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우리들인데, 그래서 우리 역시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 우리가 여전히 열심을 주장한다면 아직까지 자기 실패를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원하십니다. 왜 사랑을 원하십니까? 그 이유가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양을 치라는 것이나 양을 먹이라는 것은 다같은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일이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양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내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에게 양을 맡긴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예수님의 양을 치는 자로 세운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 점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목사에게 양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양을 치는 자로 세우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양으로 하여금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사랑하는 양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할 일은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예수님의 양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음성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양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이고 저와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신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사랑할 때 그것을 잘라 버리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세상 것을 내게서 끊어버리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을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셔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양들을 목자, 주님만 바라보는 양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내가 머무는 그 자리에서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열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열심을 믿지 않는 일에 열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이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책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의 큰 병은 자신의 힘과 열심을 앞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큰 병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기도 많이 하는가 전도 많이 하는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을 하셨음을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물로 기도나 전도 등등의 행위 자체를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와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복을 얻으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알기에 그 사랑에 감사하고 더욱 주님만 사랑하는 자로 살고 싶어서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신자의 신자다움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