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강) 요한복음 21:18-25 너는 나를 따르라

<본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한복음 21:18-25)

<설교>

3년의 기간동안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드디어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과연 요한복음에서 내가 배우고 알게 된 것을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영생을 단지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막연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어질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신앙이 우리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해서만큼 교만하지 말아야 함도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여러분이 장차 성경을 읽거나 들었을 때 여러분에게 생각나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19절에 보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그러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과 예수님의 말씀의 결과를 체험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베드로는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이 이루어짐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뛰어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으면서 배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엉터리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한 사람의 제자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따로 제자들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버린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외에는 달리 제자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고 해도 동일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제자를 선출할 이유가 없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제자들을 찾아오심으로서 드러난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계속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은 제자들의 믿음이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찾아오신 사랑이 제자들을 영생에 거하게 한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증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이런 의도에서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신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그 사랑을 아느냐?’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제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신 사랑으로 인해서 영생이 주어지게 되었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제자라면 앞으로 그가 증거할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영생에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그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해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사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인은 주님이 가게 하신 길을 가는 것이지 스스로 원하는 길을 가는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의 운명입니다. 이 길이 베드로에게는 죽는 길로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

신자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린 것이 여러분이라면 이제 여러분에게 내가 원하는 길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이끌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여러분이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같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길을 가고자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증인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 길이 설사 죽는 길이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증인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증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일 뿐, 세상에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어진 사랑이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21절)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묻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같이 예수님이 따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22절)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실찌라도 그것이 베드로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증인으로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증거하는 것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의 인생, 남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길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탐욕을 버리고 우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소망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볼 것 없는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우리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귀한 사랑을 팽개치지 말고 이제 다른 택한 백성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을 증거 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그 사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