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는 분이라는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과 대화하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사마리아 여인이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주시는 분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 자기 스스로의 지혜에 의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인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인식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인식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 스스로 자신과 대화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그리스도라면 그것은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고 판단하는 수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십니까?
11절에 보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사마리아 여인은 단지 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것이 여인의 수준이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생수를 물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그러한 반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생수를 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해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가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의 이해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인식의 범위에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을 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 모두는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를 야곱의 우물과 비교해서 말합니다.
야곱의 우물이란 야곱 때부터 내려온 우물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야곱의 우물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것은 우리도 유대인만큼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유대인과 경쟁하는 자존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을 언급한 것은 자신들에게 있는 귀한 전통의 우물에서 난 물보다 예수님이 주고자 한 물이 더 귀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보다 큰 자가 아니라면 당신이 주는 생수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자기들에게는 예수보다 더 크고 위대한 야곱이 남긴 우물에서 난 물을 먹기 때문에 예수가 주는 생수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뭔가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거절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생수는 야곱의 우물에서 나는 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를 자신들이 마시는 물의 수준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미 귀한 물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주는 물은 필요 없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인에게 물이 전혀 없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생수에 관심을 두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물이 있었고 또 다른 물에 대한 필요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세상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을 세상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것이 풍족할 때 자신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거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고 결국 그런 사람이 은혜와 사랑을 구한다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생수를 야곱의 우물에서 나는 물과 비교하여 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물의 차별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여러분은 이해할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자신의 인식의 수준에서 반문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이해를 총동원해서 하는 말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물을 길러 오지도 않게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효능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자신에게 가져오는 유익함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대화를 보면 뭔가 변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구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에게 생수를 구합니다. 구하지 않는 자에서 구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생수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수준에서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생수를 육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구하고 살아가지만 그 수준이 생수를 자기 육신의 편안함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자기 유익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신다고 할 때 성령을 받으면 자신이 남들과 다른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서 성령을 구하기도 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도 역시 은혜가 주어지면 마치 자신의 일이 잘 될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여인의 수준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만 여겼던 여인이 이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사람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자신에게 뭔가 주시는 분이라는 이해 아래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여인이 점차적으로 예수님을 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자가 예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단지 '착한 사람' '성현' 정도로만 인식하고 그에게 뭔가 구하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에게 구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그때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입니다. 단지 우리의 편함을 생각하며 구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생수를 단지 한번 마시면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효능이 있는 물로 이해하는 여인의 수준인 것입니다. 영적인 목마름이 없는 상태입니다.
여인이 생수가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것은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하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에게도 내세울 것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면 자기들 역시 예배하는 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들도 그러한 조건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이 영적인 목마름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 역시 유대인과 같았던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철저하게 신앙에 있어서 유대인의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모두 같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신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의 흉내를 내면서 신앙의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면서 신앙을 경쟁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자신이 흉내냄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인 목마름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자란 이러한 수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시듯 본문의 말씀으로 오늘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있는 것,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구하는 신자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구하지 않으면 안주신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주시고자 하는 것과 구하는 것이 일치된다면 결국 같은 마음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남편이 다섯이라는 것을 드러내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물 길러 오지 않게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물을 주겠다 안주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생수가 무엇인줄 모르는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 안주겠다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여인에게 생수가 무엇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결국 예수님이 오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남편에게 다섯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여인의 수치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남자로 만족하지 아니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평소에 자신의 남편이 다섯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수치가 예수님에 의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수치가 드러났을 때 여인은 더 이상 야곱의 우물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있고 그 물을 마시고 살면 뭐합니까? 문제는 자신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랑합니다.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수치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본질이 어떤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목말라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혜와 긍휼없이는 살아도 이것 없이는 못살겠다고 갈급해하는 다른 무엇인가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생수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세상 것을 가지고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비록 돈이 없고 남들보다 적은 소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지만 신자는 세상 것이 적음을 가지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그것으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앞에 두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때 신자라고 하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으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가 한 것을 내세우며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라면 우리도 그 여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많은 남편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신자로서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의지하고 산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많은 것에 우리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목말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서 갈급함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수치를 발견케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사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말씀대로 살아가는지, 섬기면서 살고 사랑하며 살고 봉사하며 살고 희생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의 부끄러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목사다'는 것이 사라집니다. '나는 장로다'는 것이 사라집니다. 오직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수치스럽고 악한 죄인된 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갈급해 할 것이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원할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에게 그리스도는 생수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볼 때 그것을 가려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참으로 귀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에게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자인가를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으로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