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사망이라는 비참에 처한 인간을 생명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구출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의로우신 분이 오셨음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음 편에서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고 외친다고 해도 실제 복음을 듣는 편에서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비참함의 처지를 자각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을 자각하지 못한 자가 자신을 비참에서 건지기 위해서 누군가가 오셨다는 것에 반응을 보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은 죄로 인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하게 되었고 이것이 곧 비참함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함을 자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죄를 아는 인간에게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이 보여질까요? 먼저 죄인된 인간이란 단지 죄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스스로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선포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이기에 스스로 의를 찾을 수 없고 의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아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말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를 알고 비참함을 아는 인간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 보여지는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이 고치신 38년된 병자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비참함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말씀으로 그를 고치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아무런 조건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보여주시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38년된 병자가 고침 받은 사건에서 죄인된 인간의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인간의 행위를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의를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지 못한 무지함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충실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다른 길이 필요 없었습니다. 다른 진리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시는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깨달아라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즉 자기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자각할 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에게 굴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기 행함에 가능성을 둔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에 대해서 얼굴을 돌려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합니다. 19절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본문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18절) 분노하고 죽이려고 한 것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예수님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으로 여기십니까? 과연 무엇을 보고 예수인지 아닌지 판단하겠습니까?
사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생김새에 대해서 예언했습니까?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한 선지자들이 그 메시야가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말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을 한 것은 있지만 기껏 해야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말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시 고운 모양이 없는 사람이 한둘이겠습니까? 풍채가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자가 한둘이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과 생김새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가 보는 예수님의 그림에서처럼 머리에 광채가 둘려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변화산에서처럼 하얗게 빛나는 옷을 입고 다니신 것도 아니고 항상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수종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된 표적이 없으니까 표적을 보여봐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일하시는 것, 행하시는 것이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들의 일을 보는 자는 곧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일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봤을 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아야 아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들이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과 동일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한 것은 아들의 생김새에 대한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이 율법의 완성자로 대신 보내신 아들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이해했다면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로 오실 분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일하게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었고 그 일을 아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주신 것이 38년된 비참한 처지의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비참한 처지의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서, 이처럼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자신의 비참함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살리는 일을 하시는 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3-24절에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고,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도 믿고 아들도 믿으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버지를 믿는 것은 무엇이고 아들을 믿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입술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하고, 아버지는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러한 믿음은 가짜이며 구원도 있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에 대한 공경은 아들이 행하신 의로 인해서 내가 살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에 세상에 오신 아들에 대한 최고의 공경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심판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들을 믿지 않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만 믿으면 하나님은 안믿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세상에 오신 아들로 인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고, 28절에서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어떻게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결국 듣게 하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죽은 자가 살아남에 있어서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신자가 외쳐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예수님이 아닌 부처를 전하고 통일교를 전한다고 해서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아예 복음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을 위장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위장한 복음, 그것이 바로 인간의 행함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살아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살릴만한 사람을 살린다고 말함으로서 결국 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뭔가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위장한 가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마치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판가름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서 자기 행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의 말씀을 5장에 등장하는 38년된 병자와 유대인을 두고 비교해 봅시다. 38년된 병자는 분명 예수님의 인해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병이 고쳐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일으킴을 받은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과연 무슨 선한 일을 행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가 무슨 선한 행위를 했기에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자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명을 얻은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단지 있다면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에 일어나 걸어갔을 뿐이고, 자신과 함께 죽어가는 예수가 죄없는 분이고 자기 영혼을 책임지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은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되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 선을 행함으로 그것이 의가 되어서 복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발상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 믿음이 있는 것이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긴다면 교회를 다니는 자기 행함을 믿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결과가 되버립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무조건 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믿음으로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고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킨다는 것이 악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오늘날 교회가 소위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도 얼마든지 악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이라고 여기고 행하는 것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얼마든지 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안식일에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운 진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노가 안식일 지킨다고 해서 해결되겠습니까? 주일을 지킨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심판이라면 그것을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중보자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처한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