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서 인간구원을 빼 버린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 10:10절에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언급하시기를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10:28절에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영생을 주신다고 하신 것을 보면 분명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구원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에게서 오직 구원만 바라본다면 과연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자기 구원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오심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다'는 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론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구원론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을 위한 구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많은 내용들이 계시되고 있는 것이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직 인간을 위한 구원이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어쩌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는 말 몇마디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구원이 인간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하고 믿어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선택하고 믿도록 하기 위한 설득의 수단으로 많은 말씀을 기록해 놓았다는 생각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는 대로 구원은 인간이 예수님을 선택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라면 우리 앞에 있는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이 인간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해도 성경이 인간을 설득해서 예수님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성경은 신자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면,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적이라면 굳이 인간에게 성경을 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게 해서 구원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물론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성경이 신자에게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인간 구원으로만 생각해 버린다면 그러한 질문들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많은 계시의 말씀을 남겨두신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함인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따로 구별하여 세우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모든 일들이 단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따로 계획된 하나님의 일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도구로 택함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말씀을 합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는데 그 무리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서 오게됩니다. 어찌 생각하면 예수님에 대한 열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다'는 책망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때문에 배부름을 체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에게서 배부름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보면서 세상 것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된다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세상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배부름이 꼭 세상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까?
27절에 보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의 배를 불리는 떡일까요? 아니면 돈일까요?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떡이나 돈만 구하지 않는다면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까?
26절과 27절을 연결하여 생각해 본다면 분명 '썩은 양식'은 '배부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일한다'는 말의 의미는 육신의 노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의미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일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단지 열심히 예수님을 찾아다녔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일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 즉 예수님을 찾는 것이 될 수 있고 어떤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것이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썩는 양식이 의미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한 대로 썩는 양식을 돈이나 재물, 또는 먹을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무조건 선한 것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소위 신앙행위입니다. 즉 우리가 옳은 것이라고 여기는 신앙적 행위들이 썩은 양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나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배부름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육신의 배부름만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배부름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만족'입니다. 자기 욕구가 충족되어지는 것을 배부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신앙행위들이 결국 자기 만족을 위하고 자신의 배부름을 위하고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썩은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 구원을 바라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역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믿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것 역시 자기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설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잘못됨이 없게 하기 위해서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음으로서 자신이 앞날을 준비하고 나아가서 복이라고 하는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배부름, 복이라고 하는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스스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했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옳은 것이 아니며, 헌금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정당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야말로 썩는 것을 위해서 일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있음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무엇이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이 영생하도록 있는 것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면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자란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7절이 말씀은 뭔가 앞뒤가 안맞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해 놓고 그 양식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것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차라지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거둬들이라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일단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가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분명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는 그 양식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있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4: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그와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를 알게 하고, 자기 앞에 있는 분이 바로 메시아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시는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전파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와서 잡수실 것을 청할 때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절)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당연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시 제자들의 수준에서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게는 것은 떡, 즉 육신의 양식 외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그로 하여금 예수가 곧 그리스이심을 알게 하시는 그 일 자체가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양식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양식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으로 배부름을 얻는 자 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은 영생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일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을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구원을 위해서, 자기 배부름과, 자기 만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만이 양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배부름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양식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떡에 관심을 두고 떡을 얻기 위해서 일하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오병이어를 체험하고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도 제자들과 다를 바 없는 수준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떡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약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우리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양식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하나님,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까?'를 물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인생으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히 예수님을 찾는 믿음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예수님으로 구원을 얻는 신자들이 살아가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까? 분명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신자에게는 구원이 전부가 아니며, 구원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택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단지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며 구원을 얻은 자로서 성경을 대한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답게 사는 것에 관심을 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자다움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다움은 그리스도를 좇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좇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벧전 2:9절에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거룩한 나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되게 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한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라면 바로 이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알게 하시고 어두움에서 구출하셔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의 덕을 입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을 덕을 증거하는 자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증거하는 자로 살기에 힘쓰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홀로 즐기는 자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감사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힘입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출된 존재임을 마음 깊이 깨닫고 감사한다면 자연히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위해서 존재한가를 알기에 삶의 이유와 목적을 항상 하나님에게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으로 치우칠 때 '이것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하면서 자신보다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이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