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6:32-40 하나님의 떡

32-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보면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34절 하반절에 나오는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는 말과, 4:15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말하는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이 한 말과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한 이 두 말을 비교해보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동일하게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생수를 달라고 한 것은 분명 자신에게 생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필요로 하는 생수는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음으로서 다시는 물을 길러야 하는 귀찮음이 사라지게 하는 신비한 물이었습니다. 즉 육신의 삶에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물로써 생수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은 처음부터 관심이 배부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참 떡은 세상에게 생명 주는 것임을 말씀하시자 그 떡을 자신들에게 달라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과연 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떡을 달라고 한 그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떡이 생명을 준다는 것에 마음이 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생각하는 생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영적인 생명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명을 주는 떡에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육신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영적인 생명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에 보탬이 되는 좋은 것을 본 것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믿음이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한 그들로서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신다면 먹을 것에 대한 염려는 없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만 계신다면 애써 수고하고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 걱정은 없겠다는 그 생각은 믿음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에 대한 그러한 생각이 믿음일까요 아닐까요? 보고도 믿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육신의 문제를 위해서 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신다면 여러분은 현대 교회가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가 말하는 믿음의 수준이 사마리아 여인이 목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 생수를 원한 수준이나, 무리들이 육신의 생명을 마음을 두고 떡을 원한 수준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믿음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함을 위한 세상 것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구하는 것 모두가 물과 떡을 구하는 수준입니다. 삶이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도와주신다면 육신이 편안해진다는 생각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무리들처럼 계시의 말씀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대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인정을 하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는 믿음이 있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믿음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행여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무지에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믿음을 오해하고 있다면 그러한 무지와 오해에서 벗어나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믿음에는 믿음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보여지는 믿음의 풍성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주리지 않는 것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풍성함이 있는 믿음입니까?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사마리아 여인의 요구와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의 요구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한 것은 육신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육신이 아닌 영적인 상태를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풍성함은 주로 육신의 문제입니다. 즉 육신적인 것으로는 믿음이 풍성함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실제적으로 다가오지만 영적인 상태로서의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믿음의 풍성함은 기대하고 원하기는 하지만 사실적으로 느끼고 실제적으로 다가오기란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믿음의 풍성함은 다만 생각에 머무는 추상적인 영적 상태로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무리 믿음이 있는 신자라 할지라도 누릴 수 없는 고차원적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마나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누릴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적어도 우리에게는 죽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게 오는 자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간다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믿음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믿는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의 풍성함을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에게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하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내린 하나님의 떡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 모두 기독교 상식으로도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누차 말한 대로 알고 있다는 여러분의 생각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믿음이 있는 것으로 속일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 있는 신자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옳고 그름은 성령에 의해서 가르침 받고 하나하나 깨우쳐 갈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자신의 지식에 대해서 의심을 해야 한다면 그는 평생토록 의심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알고 있으니 들을 필요 없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앎으로 여기고 그러한 앎이 있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이 바로 스스로의 앎에 속는 것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에게 나오는 자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에 마음이 동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다른데 관심을 두고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찾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과연 내가 진심으로 생명을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처럼 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의 생명을 원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영의 생명을 원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예수님을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진심으로 생명을, 하나님의 떡이신 예수님을 원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보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이것을 사마리아 여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 예수님에게 마셔도 목이 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여인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고 지금 있는 남편은남편이 아닌 여인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편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수치스런 실상을 모두 아시고 드러내신 예수님에게 여인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앞일을 예언하는 선지자로 인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인의 입에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말이 나오게 되고 예수님이 메시야며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는 말로써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에는 여인의 수치를 드러내신 예수님의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의 수치를 보게 된 여인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수치를 보지 못할 때는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한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치를 본 후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 나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수치를 해결하실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안함을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갈급함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한분 만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었던 다른 모든 것을 쳐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에 신뢰의 대상이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예수님 홀로 굳게 서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게 됩니다.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을 바로 볼 때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을 절망에서 건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자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그것이 곧 비참이며 절망임을 알 때 자연히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사실로 인정한다고 해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여기저기 다시는 분이라면 아마 '가만히 있어라 내가 가서 생명을 줄께'라고 말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게 오라는 것이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스스로 예수님이 생명을 주는 분임을 믿고 예수님에게 나오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을 생명으로 알고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스스로 올 수 없는 자에게 오라고 하시고,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37-40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주신 자가 있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그 비참함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십자가를 부지런히 말할 뿐 십자가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보지 않습니다. 부요함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말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련한 것, 곤고한 것, 눈 먼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아니면 갈 수 없는 생명의 자리 또한 마음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믿음의 풍성함은 비참한 인간의 존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어둠에 있고 비참에 있는 인간에게만 빛이 되시고 희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비참을 보지 못한다면 빛이 되시고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희망을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달라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자란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자신의 운명이 어떠함을 알기에 예수님을 원하게 된 사람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늘의 생명을 보기에 자연히 세상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음은 오직 예수님만을 원하는 믿음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원하고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그들이 생명이신 예수님안에서 누리는 상태가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누리는 것일 뿐, 우리가 하지 못해서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의 자리에서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 감사하고 생명으로 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알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을 아는 자, 그가 바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인간의 비참함을 잊어버린 채 예수님에게 나온다면 결국 엉뚱한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갈급해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면 희망이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떡으로 오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