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6:64-71 영과 육

6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영과 육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영과 육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람들은 쉽게 세상과 교회라는 상상을 합니다. 즉 세상을 육으로 교회를 영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와 연관된 일은 영적인 일이며, 교회보다 더 우선으로 하는 세상의 일은 육적인 일이라는 답을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는 영과 육은 그런 수준이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육의 의미를 떠나서 영과 육을 구분하기 때문에 육을 영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영과 육을 세상과 교회로 구분을 하려는 것은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일은 곧 거룩한 일이며 하나님을 위한 영적인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과 육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한다고 해서 영의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보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즉 유대인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짜 예배가 되느냐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3-24)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영이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을 인간의 정성과 진심으로 오인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즉 아버지에 대한 참된 예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의식으로 짜여진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예배에 대한 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문의했지만 예배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이란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것은 곧 성령과 진리에 합당한 것이며 성령과 진리에 합당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생각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육이며 성령과 진리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즉 영과 육은 행위를 두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5-6절을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 역시 육과 영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는 무작정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곧 영의 일을 생각하고 영의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즉 교회를 위한 일을 생각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좇는다는 것을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육신의 일이란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며 그 일에는 자신이 예수님을 찾는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예수님을 찾는 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찾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인 것이며 결국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오병이어의 이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은 이적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이 그들을 피해버리십니다. 여기서부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 자체가 예수님의 생각과는 맞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한 것은 그들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진심을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심이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향하신 마음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피해버린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다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배를 위한 떡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에 합당한 생명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영과 육은 앞서 말한 대로 행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을 임금 삼기 위해서 찾은 행위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만을 놓고 보자면 유대인들은 분명 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을 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은 예수님이 오신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예수님을 일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육신을 위한 떡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에 나오는 것도 누구의 생각으로 나오느냐에 따라서 육이 될 수도 있고 영이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한 자기 생각으로 교회를 나오고 예배드리며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임금 삼기 위해서 찾았던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같은 것이고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육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 역시 같습니다. 기도가 육이 될 수도 있고 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는 기도라면 그것은 육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하는 기도라면 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버립니다. 자기 생각으로 찾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생각을 내어놓자 하나같이 그 말씀이 어렵다 하며 뺑소니를 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육신의 떡을 위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생명을 위한 예수님을 말씀하고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에 머리를 흔들고 떠나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에 대한 좋은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 아버지가 죽고 나자 형이 모든 재산을 차지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형에게 명해서 재산을 자신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예수님을 선지자쯤으로 여겼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자기 형에게 명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한다면 누가 책망을 들어야 합니까? 분명 모든 재산을 혼자 차지한 형입니다. 형이 나쁜 사람이며 당장 형을 찾아가서 재산을 동생에게 나누어주라고 호통을 쳐야 당연하다는 생각이 곧 우리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동생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는 책망을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형에게 명령해서 재산을 나누도록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사람, 곧 인간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관계에서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재판장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건을 나누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생각에서 판단할 때 자기 생각으로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그자가 책망을 들어야 마땅했던 것입니다.

물론 재산을 혼자 차지한 형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형은 아예 예수님을 찾지 않은 자로서 언급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소위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예 교회를 찾지도 않는 사람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며,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찾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무엇이 영이며 무엇이 영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두고 영과 육으로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영과 육으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을 때 자신을 위한 자기 관심사를 가지고 나온다면 그것은 육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관심사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왜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피해자인 동생을 책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과 육은 서로 양자간에 타협을 이룰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영은 육을 배척하고 육은 영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영과 육을 함께 말해버립니다. 즉 육을 위해서 영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을 위해 필요한 것, 즉 육에 대한 관심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영의 일을 힘쓰라는 것입니다. 영의 일을 힘쓰면 그에 대한 상으로 원하는 육의 일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말을 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육에 대한 소원을 이용해서 영의 일이라고 말하는 교회 일로 끌어 들이고자하는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이 역시 예수님의 관심에는 무관심한 채 오직 자기 관심사를 위해서 예수님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과 육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은 육일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나 관심은 모두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에게 되어지는 일을 가지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예수님은 자신을 도우실 것이고, 예수님의 도우심은 세상에서의 일이 잘되는 여부로 증거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이 잘되면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잘못되면 뭔가 자신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첫째 영혼이 잘되고, 둘째 범사에 모든 일이 잘되고, 셋째 육신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는 3,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3요 1:3-4)는 말씀을 보면 요한은 자신이 편지를 쓰고 있는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을 합니다. 즉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말할 뿐, 가이오의 영혼과 그가 하는 모든 일과 육신이 강건하기를 바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본다면 영혼이 잘됨 같이라는 말은 가이오가 진리를 알게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며, 범사에 잘된다는 것은 범사, 즉 모든 일을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육신의 강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강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영혼과 육신이 다 잘되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그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자신의 생각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잘되는 것은 육이 잘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육이 잘된다 못된다라는 것은 인간의 시각일 뿐 하나님의 시각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면 바울에게 무엇이 있든 바울은 그것으로 자신이 잘됐다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돈을 많이 벌었다면 세상은 잘된 것으로 보자만,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바울에게는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잘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세상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역시 세상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 것이 많고 적음을 가지고 잘된 것 잘못된 것으로 구분을 하시겠습니까?

신자에게는 세상 것이 얼마가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이 다만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하면서 진리 안에서 행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만원이 있으면 만원으로 진리 안에서 행하며 사는 것이고, 백만 원이 있으면 백만 원으로 진리 안에서 행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나는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했는데 왜 나는 저 사람보다 적게 가져야 합니까?'라는 항변을 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65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로 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라든가 육신의 일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데 전혀 도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일이 잘되는 것을 자신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으로 여긴다면 결국 육신을 발판 삼아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육을 위해서 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만 강건하면 되니까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은 구분하는 이원론일 뿐입니다.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위한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이 육이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영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생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오직 육신의 유익, 즉 떡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생각으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예수님의 육의 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했을 때 사단의 말대로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지 않고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그 이유를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위해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찾느냐 찾지 않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왜 찾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자칫 잘못하면 '아 예수님 앞에서는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말라는 말이구나'라는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 '나는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않으니까 나는 정당하다'는 답을 스스로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단지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오직 생명만을 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를 찾는 것은 생명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를 구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오직 생명만을 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66절에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으로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며,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하는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 버립니다. 관심이 오직 육신에 있으며 육신의 잘됨이 곧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하늘의 생명을 언급하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에 거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단어나 문장들이 너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생각이 육신이 머물며 단단하고 강퍅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영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후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68)라는 참으로 멋진 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말씀이 어렵다며 도망을 치고, 누구는 말씀을 생명으로 인식하며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뉘게로 가겠는가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거야말로 안다 모른다의 차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멸망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끝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곧 영생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육신을 꾀한다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으로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과 함께 육을 보장해 준다는 예수 아닌 예수, 즉 다른 예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적 때문에 남은 것도 아니고 떡 때문에 남은 것도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에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에게 남이 있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누가 더 열심히 잘 믿어서 세상의 복을 더 많이 얻느냐?'라는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을 찾으면서 이러한 싸움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찾는 것이고 무익한 육에 거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처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고백을 하시는 분이라면 여러분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신 분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살을 내어놓으시고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붙잡은 자 되었기 때문에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 가운데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취하는 것보다 영생의 말씀을 아는 것이 더 즐거운 사람들입니다.

영생의 말씀을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행하고 살아가십시오. 영과 육이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육이 아닌 영으로 사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