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강) 7:1-9 세상과 예수

성경을 읽다 보면 뜻밖에도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더 뜻밖인 것은 모순된 부분들에 대해서 전혀 의문점을 가지지 않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읽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을 무조건 믿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믿으면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을 무조건 신봉하는 것 때문에 모순된 내용들을 만나도 의문점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맹목적인 믿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의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성경에 대한 불경죄를 짓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마치 성경은 의심해서도 안되고 의문을 가져서도 안되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완벽한 진리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을 계시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담겨 있는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리라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진리되는 것은 말씀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비로소 진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진리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진리를 알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으며, 모세가 어떤 일을 했으며, 선지자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일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았을 때 진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겨진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 때 비로소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에 의심을 하면 안되고, 의문을 가져도 안된다는 것은 잘못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충분히 의문을 가질 만한 모순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8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은 유대로 가기를 청하는 형제들에게는 가지 않겠다고 하시고는 몰래 혼자서 유대로 가신 모순적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가지 않겠다고 하셨으면 계속 안가시는 것이 당연한데 왜 혼자 몰래 가시는 것입니까?

가지 않겠다고 하시고 가시는 예수님의 행동에는 분명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순된 행동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그 의도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말씀이 진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을리 없습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계시의 말씀이기에 모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이해에 모순으로 보여지는 것뿐입니다.

먼저 유대로 가기를 원하는 형제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이유부터 알아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유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신에 대해서 신적인 주장을 하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음모를 피해서 유대에 다니지 않으시고 갈릴리에 다니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을 때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3절)라는 권유를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왜 예수님에게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갈 것을 권유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4절)라는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초막절이라는 명절을 이용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기를 권유한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형제들은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시고 또 다른 많은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마치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로 모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갈릴리라는 조그만 마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유대로 가서 이적을 행하고 능력을 보이는 것이 자신을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는 아주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바로 이러한 계산을 한 것입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과 영광을 얻어야 예수님이 의도하고 하고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세상의 이치대로 한다면 분명 잘못된 생각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일도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고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야 하고,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하고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두고 5절에서는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부추기는 형제들의 행동이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자신이 하늘에서 온 메시아임을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일을 하려거든 사람들이 많은 유대로 가서 능력을 나타내서 명성을 얻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형제들도 메시아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기 구원적이고 세상적이고 물질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떡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임금 삼기 위해서 쫓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이적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시험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떨치는 기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예수라는 이름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자신의 명성을 떨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명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명성을 얻으라고 권유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상하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죽으심을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 현상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도 같은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희생하신 분으로 광고함으로서 예수님의 희생으로써 그 명성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의도가 많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바라보는 예수님은 단지 선하게 세상을 살다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성인의 한사람으로 그 명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 뜻에 복종하시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예수님에게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 역시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안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이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의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을 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마음을 알기에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일 뿐,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를 말하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신자 아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으로서 내 자신이 바로 믿음이 아닌 믿음의 자리에서 스스로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내 이름과 명성과 체면과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러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목사들이 큰 교회를 그토록 원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이름과 명성에 상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골 조그만 교회에 있는 것보다는 도시의 큰 교회에 있는 것이 자신을 나타내고 자존심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같은 마음이 있을 수 있기에 오직 복음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할 수 있는 그 마음을 하나님에게 구할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판이하게 다른 두 사고방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제들의 사고방식으로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과 명성을 위해 사는 것이 형제들의 사고방식인 반면, 철저하게 자신의 명성을 버린 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사시는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그것입니다. 세상은 곧 이 두 사고방식으로 구분이 되고 어떠한 사고방식에 순종하느냐에 의해서 하나님 편의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 편의 사람인지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로 가라고 권유하는 형제들에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6-8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의 때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을 예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로 가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러야 하지만,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형제들이라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유대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일하신 분이라면 형제들의 말처럼 초막절에 유대로 가는 것은 자기 명성을 위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늘 준비되어 있는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명성을 위해서라면 기회만 되면 어느 때라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명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예수님으로서는 초막절에 유대로 가는 것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때이지만 형제들이 생각하는 때는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지만 형제들은 초막절이라는 절기가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떠한 때를 살아가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한 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서 실패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위해서 산다면 그 실패는 원하는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산다면 실패도 하나님이 주신 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서로 다른 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은 전혀 상반된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세상과 예수님으로 구분을 합니다. 이것이 7절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고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무엇을 두고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세상은 어떤 것입니까?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즉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세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불신자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불신자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하였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불신자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또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과 같은 죄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공격하고 책망하시거나 그들의 행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간섭을 했다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고소로 인해서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이방인이었던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없음을 알고 살려주려고 까지 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빌라도의 미움으로 인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미움으로 인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는 세상은 단순히 이방인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적대감을 나타내는 세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나타내고 자기 명성을 위해서 사는 것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예수님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세력을 곧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기를 나타내는 도구로 이용을 합니다. 기도를 해도 시장 거리에서 큰 소리로 합니다. 금식을 하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나타냅니다. 구제할 때는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회당과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외식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미워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들에게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상이 볼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행동에 대해서 같은 일치감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같은 일치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 자신이 자기 이름과 명성에 매어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고 우리 자신의 명성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방식에 머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패가 있다 할지라도 낙심치 않고 실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이름을 떨치고 자신을 나타내었다 할지라도 결국 썩어질 몸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대대로 그 이름과 업적을 높인다고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감춰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 어떤 이름도 정당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행동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필히 우리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포기를 해야 합니다. 내가 증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순간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개인을 보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워진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