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 7:10-18 자기 영광

사회가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준다면 이것처럼 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요즘 심심찮게 연예인들이 마약을 복용함으로서 구속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연예인들이 마약을 복용하게 되는 것은 인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연예인은 인기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예인의 가치는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인기가 있을 때에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지만 인기가 하락하고 사회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의 그 마음은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세상 속에서 인기 있는 존재로 부각되고 싶어하는 것은 연예인들에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본래 마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꽤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높여준다면 마치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세상 속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현대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 예수님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초막절이 되었을 때 유대로 가서 자신을 나타내라는 권유를 합니다. 예수님이 제대로 일을 하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낼 것을 권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들의 권유를 거절하고 유대로 가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유대로 전혀 가시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는 것을 10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분명 형제들이 명절에 유대로 올라간 후에 자신도 올라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로 전혀 가시지 않겠다는 의도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8절 말씀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보면 아직 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대로 가실 때는 따로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로 가시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수님의 때를 위해서입니다. 형제들처럼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과 형제들의 생각이 각각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명절을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때로 삼을 것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때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세상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면 분명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이고 그 권위가 높아질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세상이 오히려 자신을 미워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불신자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는 유대인이 이방인의 세계에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유대로 가라고 함은 유대인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 이방인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분명 서로 맞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7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예수의 형제들을 미워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의 형제들은 세상과 맞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예수님과 세상이 서로 연합할 수 없는 벽으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과 맞습니까?' 아마 '나는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예수님과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가 아닌 나에게 맞는 예수를 내 스스로 만들어 놨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에게서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내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빼버리고,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대신 보탬으로서 내 마음에 맞는 예수를 만들어 놓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자신과 맞는 예수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이처럼 예수 아닌 다른 예수를 스스로 만들어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며 믿고 있는 실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믿고 있는 예수가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예수님인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유대로 가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15절)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언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를 쓰는 것이 당연한데 당시 이스라엘의 언어는 아람어가 중심이었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에 자기들의 언어인 히브리어가 중심이 아니라 아람어가 중심이 된 것입니까? 이것은 옛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서 70년의 세월을 지낸 것과 이유가 있습니다. 즉 바벨론에서 70년이란 세월 동안 히브리어를 쓰지 못하고 바벨론 언어인 아람어를 씀으로 해서 자연 이스라엘은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가 아닌 종교지도자들이나 알 수 있는 언어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이 히브리어인 말씀을 가르치자 그러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당연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안다는 것은 분명히 기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의 반응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디에서 배웠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에서 가르쳤던 말씀은 예수님의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는 말씀에 중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유대인이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기이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이 '배워야 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 유대인들만의 사고방식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입니까? '배워야 안다'는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옳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사고방식을 옳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배워야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이란 배웠을 때 충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 역시 배움을 통해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교훈만큼은 배워야 할 수 있는 지식의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도 배운 자가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유대인들의 반응은 당연합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분명 기이한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움과 상관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라면 결국 유대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배운 사람이 많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력이 낮은 사람보다는 학력이 높은 사람이 더 많이 알 것이고, 더 잘 가르칠 것이고, 배울 것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 앞에 일자 무식인 사람과 박사가 말을 한다면 누구의 말을 신뢰하겠습니까? 당연히 박사의 말을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말이 옳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박사라는 학위를 신뢰함으로 그의 말까지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이 세상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이 더 많이 알고 옳게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복음만은 예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교훈은 내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배움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배워서 알 수 있고, 배워서 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은 신학전문가의 소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복음을 아는 자는 모두 신학자요 목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전문으로 공부하지 못한 일반 신자가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해도 그 수준은 절대로 목사나 신학자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복음이 그러합니까? 복음이 과연 배운 자들의 몫입니까? 이것이 복음이라면 복음 역시 가진 자, 배운 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나에게서 나오는 교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의 지식과 배움에서 나오는 교훈이 아니기 때문에 배웠느냐 배우지 못했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말씀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지적 재산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지식도 소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배움과 지식에 의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조차도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하물며 우리들에게야 복음이 하나님의 것임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복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배움과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전한다'는 것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교훈은 인간의 지식이나 학력을 가지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지식의 산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은 오직 목사만이 가르치고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서 교사를 선정할 때 학력을 보고 뽑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사란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왜 학력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까? 박사가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다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복음을 아는가를 보면 되는 것인데 학력을 본다는 것은 결국 유대인이 사고방식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 1: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자기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학력이 높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복음을 더 잘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고전 2:4-5절에서도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씀하는 것을 봐도 복음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복음서와 사도 바울서신에서 뭔가 지적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와 사도바울 서신의 복음의 질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글 자체가 지적이냐 지적이 아니냐라는 것은 복음에 있어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평신도가 복음을 말하는 것과, 목사가 복음을 말하는 것에 전혀 차이가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복음의 차이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목사의 복음이 평신도의 복음보다 더 깊다라는 식으로 이해해 버린다면 결국 복음을 사람의 지혜와 지식에 의해서 증거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만이 배운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배움의 수준으로 복음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7-18절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힘쓰는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건만을 보고 그 말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만 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조건을 보고 말을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극히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가령 목사가 복음을 말할 때는 귀를 기울이면서 목사가 아닌 신자가 말할 때는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그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복음에는 '안다'는 반응이 아닌 '복음으로 사느냐?'라는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복음을 가르칠 때 '다 아는 말이다'라는 반응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다만 복음을 듣는 것이 전부라는 것 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나의 지식으로 복음을 들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들어야 하는데 지식으로 복음을 듣기 때문에 '안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시큰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닌 심지어 어린아이가 복음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 말에 마음을 기울이는 그가 바로 복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덧붙여서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을 구한다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배워서 알게 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것이 아닌 자기 것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것으로 자기 영광을 삼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 인기를 얻고 설교를 잘하는 목사라는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이용해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속에 불의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불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아서 전한 것이라면 모든 영광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마땅한데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면 불의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형제들의 서로 맞지 않은 생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구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는 예수님과 맞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9절부터 언급하는 율법에 대한 얘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율법을 대했다면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자기 영광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복음은 인간을 십자가 앞에 죽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영광은 불의일 뿐입니다. 신자가 무엇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되어진 것이지 스스로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지 스스로 알게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으로 산다해도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땅히 나를 그렇게 살게 하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으로 살고, 그분의 능력으로 복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잊어버리고 말하고 행하는 나를 보는 것이야말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행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내가 한다는 이 사고방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수시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길로 가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말하고 하나님이 하게 하셔서 한다는 이 생각에 여러분의 마음이 굳게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참된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