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7:19-24 율법

'율법이냐 복음이냐?'에 대한 논의는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오는 여러 논의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 시대고 신약은 복음 시대라는 주장도 있고, 율법은 단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는 것이니 그리스도 오신 이상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복음 시대이지만 말씀으로 사는 것은 있어야 하니까 지금도 역시 율법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율법이든 복음이든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하나만은 선택해야 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만큼 율법 역시 버릴 수 없다는 입장에서 율법과 복음 모두를 수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율법과 복음을 서로 구별해서 율법이냐 복음이냐는 논의 자체가 성경을 벗어난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과연 복음과 상관없이 주신 것이겠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구약은 율법으로 구원받는 율법 시대인데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해서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구원의 길로서 복음을 주신 것이겠습니까? 물론 지금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길에 서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말하면서도 율법에 매어 있는 모습이 많이 보여지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결국 판단은 자신의 행위를 기준하는 것 역시 많이 보여집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섭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율법은 항상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만을 묻습니다. 지킨자는 정당하고 지키지 않은 자는 죄지은 자로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곧 율법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직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에 준수하는 것만이 신앙이고 옳은 것으로 인정받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곧 복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죽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말대로 하면 예수님은 피해망상증 환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적이 전혀 없는데 예수님 스스로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5:18절의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을 내세워서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죽이려고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기 보다는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자세가 곧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이라면 결국 자신들의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니까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기 위한 너희들의 열심이 나를 죽일 것이다'는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도 책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간 적이 너무 많았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율법적인 사람은 항상 자신의 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입니다. 예를 들어서 현대 교회에 기도하는 것, 헌금하는 것,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 봉사하는 것, 이런 것들은 거의 율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본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나 헌금이나 주일 지키는 것을 법적인 것으로 인식할 때 사람들은 자연히 지킨 자와 지키지 않은 자로 구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킨 자는 당당하게 지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법을 가지고 상대방을 심판하고 죽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난 지켰는데 넌 왜 안지켰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미 5:18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을 말씀드렸는데, 유대인이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이 빌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을 단지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만 볼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지키느냐에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율법의 기능이 지킨 자와 지키지 않은 자를 구별해서 지키지 않은 자를 비판하고 심판하는 것인가 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서 유대인과 논쟁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점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만약 율법이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에 대해서 도외시 해버리면 결국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단순히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를 가지고 싸우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유대인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 밖에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속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결코 지킬 수 없는 하늘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지킬 수 없는 법을 두고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사실 의미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킬 수 없는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부러 인간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 한가지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법은 분명 준수를 요구합니다. 준수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오직 심판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 준수를 요구합니다. 100개 중에 99개를 지켰으니 나머지 한 개는 비록 지키지 못해서 봐준다는 것은 법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실수를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법은 그 사람이 착한 일을 봐서 사람을 죽인 것을 없는 일로 넘어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착한 일을 해도 법은 단 한 개의 법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준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애초부터 법에 대한 준수를 목적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법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허물 많은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속의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깨닫고 그분을 의지할 자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단지 착한 성인으로 여깁니다. 즉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다만 그 착한 행위를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신은 누군가의 희생을 의지해야 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역시 자신들을 대신해서 심판받고 죽어야 할 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준수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서 문자만을 봤을 뿐 율법의 의미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은 사랑을 요구하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이웃을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을 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 사실을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복음을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지켜내라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 밖에 되지 않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대신 심판을 받고 대신 죽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애당초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길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갈 3:24-25절의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감사하고 의지하는 그것이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안에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들은 스스로 율법의 조항을 하나하나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믿음안에서 율법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뛰어 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믿음으로 산다면 그의 삶의 하나하나는 율법을 이루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즉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랑이기에 믿음으로 사는 삶의 열매가 사랑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곧 할례입니다. 할례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난 날에 따라서 할례를 행하는 날이 안식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유대인들은 과연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할례를 미룬다면 그것은 곧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됩니다. 하지만 할례를 행한다면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법을 어기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들은 할례라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했으며 이런 경우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거룩하게 되는 길이었기 때문에 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하게 되는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에 할례를 행할 수 있다면, 전신을 건전케 하는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다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순종했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던 율법에 대한 의미에 순종하는 것이 진심으로 겸손한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들의 자존심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에 대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위험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굳세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나 역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24절에 보면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지켰는가 안지켰는가, 행위를 두고 판단하지 말고 그가 하나님의 공의 아래 거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가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가는 이웃에 대해서 자신을 어떤 자로 드러내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우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을 죽임으로서 드러나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자신을 죽인 자가 자기를 자랑하거나 남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자랑할 뿐입니다. 진정한 율법은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가를 묻습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랑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율법이며 율법을 이루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