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7:25-36 안다는 것

신자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데 어떻게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성경과 상관없이 가지게 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스스로의 교회 생활을 통해서 습득한 지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교회 생활을 통해서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쌓아갑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기존의 교인들을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것, 기도하는 것, 그들의 교회 생활 등이 스승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부분을 습득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인들의 행동과 삶에 대해 전혀 책망이 없는 목사의 설교는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오류가 없음을 믿게 해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스스로 습득한 지식이 참된 복음을 믿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이 다른 지식이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고 본래의 지식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가 배척되고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가 진짜 구실을 하면서 잘못된 신앙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자신의 앎에 대해 신뢰를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을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앎이 성경에 의해서 확인되고 보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과 상관없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맞다는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집에 의해서 복음이 배척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앎이 참된 것인가 참된 것이 아닌가는 여러분이 자신의 앎에 복종되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알게된 하늘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여러분에게 복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참된 앎을 가진 신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앎을 기준으로 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자신의 앎을 성경을 상고함으로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성경이지 여러분의 앎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앎이 '과연 그러한가' 끊임없이 살피고 상고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는 말씀을 합니다.

베뢰아 사람의 신사적인 모습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입니다. 즉 이들이 신사적이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들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사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신사적인 모습이 필요합니다.

현대 교인은 들은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자신이 신뢰하는 목사가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것은 자신의 앎으로 굳혀 버립니다. 스스로 성경을 상고함으로 확인하고 성경에 의해서 굳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 대해 신사적이지 못합니다. 성경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신뢰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구축된 앎이 오히려 복음에 대해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25-27절을 보면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친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내용에 전혀 반대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두고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라는 조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의 가르침을 가로막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으로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을 안다는 것이고,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사람은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무엇이 겁나서 그가 말하는 것을 막지를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이 오신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지식으로 예수님을 볼 때 예수는 절대 그리스도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지식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28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앎은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의 생각일 뿐이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참이시니'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분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언급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면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내서 오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을 보니까 결국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을 분노하게 하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말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고 모욕하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완벽하다할 정도로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의 분노를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 나는 안다. 따라서 나를 모르는 너희는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를 높이는 자기 고집에 지나지 않고 정신나간 사람의 외침이며 신을 모독하는 이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신약에 와서 비로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약의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구약에 대한 자기들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메시아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식을 기준으로 할 때 예수님은 도저히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강한 자였습니다. 강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는 극적인 일을 이루어 내실 분이 그들의 그리스도며 메시아였기 때문에 예수는 도저히 그들의 메시아 조건에 충족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사야서 53:1-6절에서 예언되는 것처럼 메시아는 강한 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질고를 당하고 매맞음을 당하는 약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말씀과는 정 반대의 메시아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성경을 말하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말하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다릅니다. 예수님을 말하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이 맞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네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에 대해서 발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앎을 신뢰하고 있기에 자신의 신뢰를 부인하는 말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너만 아느냐 나도 안다', '너만 복음이냐 나도 복음이다', '다른 사람은 다 틀리고 너만 옳으냐?'라는 것입니다. 아마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겨우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의 아들인 자가 전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앞에서 성경을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며 심지어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낸 자로 일컬을 때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너만 아느냐 나도 안다', 또는 '너만 복음이냐 나도 복음이다'라는 등의 말은 결국 자신의 앎과 자기 복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존의 앎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앎을 세웁니다. 이 모두는 성령이 오심으로 되어집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필히 거치는 과정은 기존의 앎에 대한 부인입니다. 내 지식과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신에 대한 지식이나 예수님에 대한 앎들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앎을 부인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 생각하는 신이란 자기를 위한 신일 뿐입니다.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신이며, 그러한 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신에게 나름대로 정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 조차도 자기중심적으로 오해합니다. 즉 나를 구원하고 천국 보내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구원으로 끝나고 마는 십자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도 크게 오해를 합니다. 이적을 단지 신기한 능력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31절에 보면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리스도가 온다고 해도 예수가 행한 표적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는 말까지 합니다.

이들은 누가 진짜 그리스도냐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관심은 이스라엘을 해방할 강한 자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라면 그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잘못은 오늘날 신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다며 예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참된 예수냐?'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어떤 예수든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도와주고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해줄 수 있는 신이라면 진짜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가짜 예수는 인간의 편을 들지 않고 인간을 위하지 않는 예수이며, 오히려 인간에게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가기를 원하는 예수일 것입니다.

예수라 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신 바로 그분이 우리의 생명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내가 믿는 예수는 참된 예수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 예수가 여러분의 삶에 도움이 되어주고 세상에서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라면 십자가 지신 예수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십자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생명이기 때문에 십자가로 끌고 가시면서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 참된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자체가 잘못되어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안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안다'는 생각으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경을 상고해야 할 이유를 상실하게 해버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삶은 앎을 따라가는 것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안다해도 아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삶이지 지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이 아닌 따라가는 것으로 믿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 앎이 여러분 안에서 진리가 되고 여러분의 삶은 진리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