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절에 보면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목이 마르면 마실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마름을 무엇으로 해결하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지 물을 필요로 하는 목마름이라면 물을 찾아서 마시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목마름이 단지 물을 필요로 하는 목마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성공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수 있고, 사업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목마름은 자신이 얻기를 갈급해하는 것을 소유하게 됨으로서 해갈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하지도 않는 것을 주면서 이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에서의 전제 조건은 예수님에게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목마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을 마시기를 싫어하는 나귀를 끌어다가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갈급해하지도 않고 목말라 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내게로 오라고 외쳐본들, 또 억지로 끌고 온들 예수님을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이나 열심을 내라고 강조하는 것은 중요한 것 하나를 뛰어 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예수님을 열심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스스로의 의지를 발휘해서 열심을 내라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예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과 갈급함에 의해서 나타나지는 자연적인 반응이며 열매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고기 맛을 모른 사람에게 '이것은 맛있는 고기인데 왜 먹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기 맛을 안다면, 자연히 고기를 먹고 싶어할 것이고, 먹지 말라고 해도 자연히 고기로 손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자'라고 무작정 말할 것이 아니라 과연 내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우선인 것입니다.
먼저 37절을 다시 살펴보면 예수님은 명절 끝 날에 유대인을 향해서 '내게로 오라'고 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7:2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 끝 날에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에게는 삼대 명절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지 않을 때 이스라엘에게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절기는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기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추수절로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야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그 땅에서 얻은 소산물로서 초막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초막절의 중요한 의미는 자신들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자체를 생각한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살았던 그들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은 선물이며 은혜였던 것입니다. 다라서 초막절에 드리는 소산물은 단지 열매를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드려지는 것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망으로 가득했던 이스라엘의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근거가 어디에 있었는가? 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근거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개념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그때부터 생명의 근거가 피에 있었던 것입니다. 심판에서 해방되는 피의 은혜를 입은 자로 애굽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 군대는 모조리 죽은 홍해에서 이스라엘만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도 피의 은혜를 입은 자로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광야에서의 원망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피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초막절에 드려지는 열매에서 열매를 얻게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되어진 것임을 감사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초막절을 지키게 하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초막절만이 아니라 유월절이나 맥추절 역시 같은 이유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삶의 이유와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초막절이란 절기를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기를 지키는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초막절을 통해서 자신들을 살리기 위한 제물된 어린양의 피를 보는 것이 진심으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맺어진 것이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초막절이고 절기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교회는 절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로서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이상한 교회로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진정한 절기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믿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절에 헌금한다고 해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사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의미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막절의 끝날에 '내게로 오라'고 외치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것은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드러내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길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에 모여서 제사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과 절기라고 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의 길이 있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을 생수를 얻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자신들의 길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길이 있었기에 다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없게 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의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마름은 자신이 믿음의 길로 여기는 그 길을 가지 않은 것이지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길은 기도하고 주일 지키는 것이라고 할 때, 이들은 자신들이 생명을 얻고 생수를 마시게 되는 것을 그 길에서 찾을 것입니다. 즉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자기들이 사는 길이고 은혜를 누리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고,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들은 기도하는 것에 갈급하게 되고 주일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지키게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노파심에서 제가 꼭 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고 주일 지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원하고 그리스도로 갈급해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고 성도가 모이는 그 자리를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연히 기도하게 되고 자연히 주일이면 성도의 모임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고 주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여겨버리면,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갈급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갈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단순히 자기 행위를 좀 더 열심히 하는 쪽으로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함으로써 갈급함을 해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서 목말라 하십니까? 여러분의 속에 목마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세상 것은 아닙니까? 그러한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가는 길이 잘못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행위에 목말라 하지 마십시오. 행위에 목말라 하게 되면 결국 행위로서 만족을 얻고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목말라 할 분은 오직 예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목말라 하라'고 외친다고 해서 순순히 그 말을 따를 사람들이 아니기에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목말라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다른 길을 하나하나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생명된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는 길이 돈입니까? 출세입니까? 우리의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가 이르렀을 때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이었는가가 확고하게 증거될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더 큰 가치로 다가오게 되고, 결국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하면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은 장차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현재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장차 되어질 것 주어질 것에 대한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가지게 되고,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삽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기에 그에게 있어서 심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늘 현재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심판에서 우리를 살리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에 있음을 생각하게 되고 자연히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의 길 되심을 알기에 예수님을 목말라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은 자신의 행위 역시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자신의 행동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38-39절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오십니다. 믿었기 때문에 성령이 온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성령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나 상의 차원이 되버립니다. 그리고 성령이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온다는 것은 성령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어떤 노력과 종교적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할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어떤 길로도 죄에 대한 해결책이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에게로 끌어갈 수 있음을 믿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을 잊고 있다면 신자로서 누릴 수 있는 큰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손해가 있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뭘 지키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돌아볼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목말라 하며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풍성한 열매로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