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 7:40-52 갈릴리

교회에서 가장 빈번했던 싸움을 말한다면 아마 성경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성경 해석이 진리이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맞지 않은 상대방의 성경 해석을 공격하고 심지어 비진리라고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에는 수많은 교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몇 개의 교단이 있는지 정확히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교단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소위 '진리싸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가 자기 것이 진리라고 내세우면서 비진리와는 함께 할 수 없다며 분리를 서슴치 않은 행동을 보면, 참으로 성경을 사랑하고 비진리에 대해 양보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군사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 내막에는 대부분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행동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진리 싸움이란 진리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오직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싸움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싸움이 없이 진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거짓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세상은 싸움 없이 진리를 따라갈 수 있는 진리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탄의 세력안에 있습니다. 사고방식 하나하나가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사고방식 자체를 거부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로 사는 것은 자신이 부인되어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거부되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자가 자기를 포기하며 진리를 따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고집하는 것을 진리 싸움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결국 지식과 지식의 부딪힘이고 고집일 수 있는데도 진리 싸움이라는 명목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무기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말하면서 '당신은 우리와 맞지 않으니까 나가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며 성경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성경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기보다는 성경을 자신의 뜻대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안다'는 것을 스스로 조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안다고 여기는 그 앎이 자칫 잘못하면 복음에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결과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두고 '선지자다, 아니다 그리스도다, 아니다 선지자도 그리스도도 아니다'라는 쟁론도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로 말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근거로 내세운 성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41-42)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들은 그 이유로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다윗이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성경 말씀을 내세운 것입니다. 사실 미가서 5: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를 두고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하나님으로서 하늘로부터 오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베들레헴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베들레헴 예수'로 불리우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로 불리웁니다. 그렇다면 미가서의 예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갈릴리 사람인 예수는 그리스도일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은 분명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과 지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조건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 같으면 누구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두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답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겠지만, 그들이 근거로 삼는 성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사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입장이라면, 성경을 근거로 내세우는 그들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봐라,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은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예수는 갈릴리에서 왔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일리가 있느냐? 만약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면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잘못된 것이란 말이냐?'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그 말에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반대하려면 역시 성경으로 그들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증거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러면 성경에 '그리스도는 갈릴리에서 온다'라는 구절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헛점입니다. 성경을 문구대로만 이해하면서 이 문구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곧 성경에 무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문구대로 했을 때 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도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 2:2)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롯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 묻습니다. 그때 그들 역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말하면서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은 유대 정통적인 성경해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예언을 했는데, 정작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22-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말씀에 보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선지자는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예언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하셨으면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하셨으면 예수님을 베들레헴 사람 되게 하셨으면 적어도 베들레헴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좁은 소견이고 낮은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예수님이 옛날 예언대로 태어나시고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단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 예언대로 맞아떨어지는 점쟁이 같은 수준에서의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이나,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갈릴리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하시는 그 모두가 그저 말이 맞아떨어지는 수준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4절에 보면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도 우리에게 의문을 갖게 하는데, 그 이유는 요셉이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헤롯을 피해서 애굽으로 가서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요셉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애굽으로 갔는데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말이 어떻게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것을 보면 선지자로 말씀하신 애굽은 애굽이라는 실제 지명을 두고 한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것을 애굽에서 나온 것으로 말씀한다면, 결국 예루살렘이 애굽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그것이 곧 애굽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경 문구만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문구만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의 의미를 모르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은 베들레헴 사람으로 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베들레헴 사람으로 온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은 그리스도일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9:1절에 보면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나사렛 사람으로 오신다는 말은 이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동방에서는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는데 예루살렘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이방 갈릴리의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지만,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되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면, 성경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앞의 예수가 곧 그리스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앞세워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거부합니다. 애당초 예수님을 인정할 의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을 하게 되면,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오던 종교지도자로서의 위치는 흔들리게 될 것이 뻔합니다. 때문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52절에서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는 말을 하면서 예수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님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50절에 보면 3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이 니고데모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는 말을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보면 재판은 공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들어서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 재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조치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이었다면, 자기들 스스로 말씀을 벗어나는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싫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증인을 세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서 재판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작정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을 내세우며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들에게 '이것이 과연 율법이냐?'라는 말을 했습니다. 율법을 사랑하고 지킨다고 하는 그들에게 '너희들 스스로 율법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질책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를 그들은 예수와 같은 갈릴리 사람이냐는 말로서 예수와 한패거리로 몰아갑니다. 니고데모 입장에서 보면, 성경을 말하는 그들은 참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45절부터도 그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을 보내서 예수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잡아오지 않습니다. 왜 잡아오지 않았는가 물으니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이 이때까지 없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지금까지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는 말로 질책을 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인 자신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데 왜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조건 우리가 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사가 말하는 것만 믿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 알지 무슨 말이 그리 많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교회에 해가 되는 논리나 주장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함께 뭉쳐서 배척을 하고 이단으로 몰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해가 되는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발전과 존속에 해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따질 뿐입니다. 교회가 발전되는 논리라면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성경을 대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주일에 대해서 성경으로 말을 하면, 마 23:23절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구절 하나로서 주일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주일에 모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주일 하루만이 거룩한 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데도 성경 한 구절을 들이대면서 주일은 거룩한 날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랑한다기보다는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 끝까지 주일이란 한 날을 거룩한 날로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성경이 아닌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구절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린 자칫 잘못하면 내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확신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더 깊은 뜻을 놓쳐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행동하시고 일하십니다. 내삶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어느 하나로 고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여겨버린다면 그것은 말씀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나의 생각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 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내 생각 내 의도를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는 사람인지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