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 8:1-11 간음한 여인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일 것입니다. 특히 본문의 내용 가운데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많이 인용할 정도로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용하는 목적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비판하고 욕할 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을 함으로써 '네가 나를 비판하고 욕할 자격이 있느냐? 너 역시 나와 똑같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 아니냐?'는 공격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의미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에서 단순히 '우리는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러니 남을 비판하지 말자'는 교훈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본문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깊은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리고 또한 누군가의 공격과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인용을 한다면, 그 역시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깊은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상식 정도로 알고 있는 성경을 어떻게 인용을 하든 우리가 상관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이며 말씀으로 삶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는 신자라면 본문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깊으신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로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마치 죄를 지은 여인을 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온 것처럼 보입니다. 즉 예수님을 재판장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생' 즉 랍비라고 부르는 이유도 자신들이 마치 예수님을 재판하시는 분으로 높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절에서 그들이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시험함이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간음한 여인을 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한 고의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것은 세가지입니다. 즉 '율법대로 돌로 치라'는 것과 '나는 사랑이니까 율법대로 하지말고 용서해라'는 것과 '율법이 있기는 하지만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너무한 처사니까 매를 몇 대 때리고 용서해라'는 식의 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답도 이 세가지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대로 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 외에 다른 답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세가지 중에서 어떤 답을 할 때 예수님이 그들의 시험을 피할 수 있습니까? 결론은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답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시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대로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한다면 비록 율법대로 행한다는 말은 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평소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 또 율법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7:49)라는 비난을 들으셨고, 그리고 내게로 와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과는 전혀 맞지 않는 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평소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예수님 스스로 부인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대로 돌로 치지 말고 용서해라는 말씀을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답을 하신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세우신 율법을 폐지하신 것이 됩니다. 율법에는 음행한 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곧 율법을 무너뜨리고 폐지하신 분으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5: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돌로 치지 말라는 말을 하신다면 스스로 율법을 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역시 고소할 조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로는 치지 말고 그냥 매만 때리고 용서해줘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 역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누구도 더하거나 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8:7)라는 말씀은 그들의 허점을 명백히 드러내는 말씀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9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어른으로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하나씩 다 나갔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스스로 '죄 있는 자'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들 역시 죄 있는 자인데 자기의 죄는 생각하지 못하고 여인의 죄에 대해서만 심판하려고 한 잘못됨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의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그 한마디의 말에 의해서 자신들은 여인을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는 것인데, 과연 사람이 그렇게 쉽게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철저했으며 그것으로 자신들은 의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는 6절의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일 수 있으며,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 글을 쓰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본문에서는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그러한 추측은 능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여인에게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른은 단지 나이 많은 사람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유대인 사회에서 어른으로 존경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신들이 어른으로 공경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 자리를 떠나는데 감히 젊은이들이 '내가 돌로 치겠다'고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른이 돌아가니 자신들은 더욱 돌아가야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신 것에 대해서 한가지 의문은 무엇 때문에 두 번이나 글을 쓰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글을 쓰시고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8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글을 쓰신 사이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리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을 알려고 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생각과 추측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에서 그 의미를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음행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그들은 율법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묻는 것은 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율법을 범한 자를 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율법을 진심으로 아는 자였다면 먼저 자신들부터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율법으로 정죄를 받지 않고 다만 남을 정죄하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안다하나 율법을 모르는 것이며 율법을 지킨다 하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이 규정한대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도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에 의해서 자신이 정죄함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곧 불의한 자이며 허물 있는 자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진심으로 율법 앞에 자신을 세운 사람이며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키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과 예수님이 두 번 글을 쓰신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직접 글을 쓰신 것이 세 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다니엘서에서 교만한 벨사살 왕 앞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쓴 것이 있고, 다른 두 번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에게 율법을 받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1: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은 모세가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쓰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돌판을 받아 산을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돌판을 깨버립니다. 그런 후에 다시 산으로 올라가게 되고 다시 두 번째 돌판을 받아 올 때도 역시 하나님이 직접 쓰셨던 것입니다. 이 역시 출애굽기 34:1절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신 돌판과 돌판 사이에 있는 것은, 우상을 섬김으로서 율법에 대해 실패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또 다시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이미 우상을 섬김으로서 율법에 실패한 이스라엘인데 다시 율법을 줘봐야 지키지 못하고 실패할 것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주신 것입니까?

이것은 출애굽기 33:19절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은혜와 긍휼이지 율법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번째 돌판을 주시기 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두 번 째 돌판은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돌판은 어떤 기능으로 주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도록 하는 기능입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 앞에서 정죄함을 받는 것이고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는 불의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글을 두 번 쓰시고 그 사이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쓰신 글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는 말씀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은 죄인임을 드러내는 말씀이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대로 시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조건은 죄없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율법에 대해서 흠이 없는 자라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볼 때 여인을 심판할 분은 오직 율법에 대해 흠이 없으신 예수님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11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은 율법을 범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규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음행한 자는 돌로 치라는 규례가 분명히 주어져 있다면,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돌로 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은 돌로 치라고 하는데, 무작정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다면 돌로 치라는 그 규례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분명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집니다. 누구에게 입니까? 바로 음행한 여인에게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인이 맞아야 할 돌을 예수님이 대신 맞으십니다. 여인이 죽어야 할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와 사랑이 모두 만족케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여인도 간음한 여인을 고소하는 사람도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즐겨하는 것 중 하나가 남을 고소하는 것이 아닙니까? 타인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서 고소하고 비판하기를 즐겨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용서함을 받는 적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허물에 대해서 가려주고 용서할 마음의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에 대해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동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아닙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사람인 내 본성으로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새생명을 얻은 새사람된 마음으로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마음대로 살아라고 해서, 이웃에게 해가 되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이웃을 해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남의 실수와 허물을 고소하고 정죄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옛사람된 본성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서 다시는 음행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의 죄가 무엇으로 용서받았는가를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인에게 다시는 간음하지 말 것을 원하셨다면 '가서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간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서 또 간음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이란 행동은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자연히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뜻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간음, 살인, 도둑질과 같은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고 있고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간음이 나오게 되고 살인 도둑질 같은 이웃을 해치는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간음하지 말아야지' '내가 남은 비판하지 말아야지'라는 의지를 스스로 갖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이고 내가 예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자연히 그 마음에서는 간음이라는 것, 남을 비판하는 것 등의 모습을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러한 욕구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기나 비판이 있겠습니까? 율법은 남을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바로 정죄 받은 이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비판할 자기 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이것이 죄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정죄함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음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