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강) 8:10-11 정죄하지 않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1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은 죄에 대한 완전한 사면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누군가를 정죄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심판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너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면, 결국 그 여인은 누구에게서도 죄에 대한 정죄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다시는 간음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죄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일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으니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닌 주의 종으로 살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오해는 예수님을 마치 죄를 용서하는 전문가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죄를 범한다고 해도 '예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죄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예수님을 인간중심에서 생각하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것 같은 생각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죄를 용서받은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라면 자신이 죄가 용서받은 것을 즐기기보다는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교인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죄에 대한 용서를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죄에 대한 담대함까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범해도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는 생각이 결국 죄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다시는 죄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죄의 종에서 해방된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그것은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본성대로 산다면 그것은 곧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되었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얽매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부르며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제대로 알고, 성경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서 정확히 성경적인 답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우리 행위로 구원을 얻나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요' 이것이 정확한 성경적인 답이지만, 이러한 답을 말한다고 해서 신앙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적인 고백을 한다고 해서 신앙으로 인정되는 것이라면, 천국은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간음이란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간음이란 행위에 대한 사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간음은 용서하고 다른 행위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여인의 '간음'이라는 행위를 들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간음이란 행위에 대해 돌로 치라는 처벌 규례를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 누군가를 행위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용서 아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위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심을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자가 다른 사람의 행위를 두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자신 스스로 예수님의 용서 아래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현재 우리 자신이 간음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서 항상 보여지는 것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간음한 여인인데도 바리새인의 입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누구입니까?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율법에 의해서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은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여인을 정죄하고 끌고 오는 바리새인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행위를 기준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위를 기준하여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있는 잘못된 행동이 자신에게는 없을 때 적어도 나보다 잘못된 행동을 한 그 사람에 대해서는 당당한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이처럼 행위를 기준하여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가 성도의 행위를 두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곧 죄인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원수는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20절의 말씀대로 은혜는 죄가 더한 곳에 더욱 넘칩니다. 우리 형편이 좋아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깊이 자각할 때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누군가의 행위를 보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머물게 된다면 그것은 사탄의 함정에 빠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탄은 신자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다같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 전혀 의가 없다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어떤 행동을 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이 분명한 만큼 누구에게도 의의 행동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두의 행동은 죄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간음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간음한 여인을 징벌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마치 자신들은 간음한 여인을 징벌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예수님에게 여인을 끌고 온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된 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의가 있다면 예수님의 은혜는 필요 없는 것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보는 것이 복음의 원수이며 적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점을 잊어버린다면 복음의 원수로 존재하면서 정작 자신 스스로는 가장 복음을 잘 아는 사람이며 복음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턱대고 여인의 죄를 덮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값은 분명히 치러져야 합니다. 그것이 죄의 값입니다. 그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여인은 죄의 값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질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나의 환경과 형편만 좋게 만들어 주시면 열심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증명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평할 때마다 그들의 불평의 이유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40년 간 광야에서 지냈지만 사실 지내는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의복이 헤어지지도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게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좋은 형편과 환경이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야말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내 힘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인간이기에 내 마지막은 멸망뿐임을 아는 신자들에게는 큰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죄에 대한 감각이 없이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무가치한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로 소돔과 고모라 때와 같고 노아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지금과 다른 더 큰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 역시 우리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멸망의 이유는 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 심판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심판에 대한 감각도 무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결국 살아가는 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죄인 됨을 다시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죄인이면 죄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보지 않기에 형제에 대해서도 행위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사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