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빛이신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 과연 누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는 바로 자신이 어두움에 다니고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어두움은 그 길이 멸망을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두움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줄 빛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빛을 찾았다면 빛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그는 바로 자신이 어두움에 있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아예 어두움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어두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두움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빛이 필요가 없습니다. 빛은 어두움에서만 필요한 것인데 어두움을 모르니 빛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빛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다만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빛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빛이 아니라 어두움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빛이 되시는 분으로 보는가 입니다.
어두움을 홀로 걷는다면 그는 분명 잘못된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빛이 필요한 것이고 빛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굳이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맹목적인 신앙이며 단지 종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왜 어두움이라고 말합니까? 창세기를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음으로 세상은 어두움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에 의해서 감춰졌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생명을 원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에덴동산에 뱀이 존재했다는 것은 곧 죄가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죄가 정체를 드러낸 것이 바로 하와를 유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정체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뱀으로 인해서 드러난 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은 하나님이 감춰버린 생명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곧 생명보다는 자신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유혹에 더 이끌린 결과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생명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육체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부지런히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곧 어두움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어두움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생명에 관심을 두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의 빛임을 알기 때문에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한 여인을 끌고온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행위가 곧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실천이 곧 빛이며 생명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율법으로 타인을 정죄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빛 가운데 행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서 간음한 여인만이 아니라 그 여인을 끌고온 모든 사람들, 나아가서 온 세상이 어두움에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중요한 것은 어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뭔가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나의 생명의 길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전혀 의를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자신의 악함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것을 죄를 범치 않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밀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1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거를 부정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증거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인즉슨 네 자신에 대한 너의 증언을 확증해줄 증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너의 증거는 참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만약 예수님이 생명의 빛임을 인정한다면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왔던 신앙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제사를 드리는 것도 전혀 의가 될 수 없다면 결국 자신들이 지금껏 행해왔던 모든 것들이 부정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예수님이 빛이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와의 연합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셔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시지만 바리새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홀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와 함께 하신 상태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시는지를 모릅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증거를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누구도 증거할 수 없는 말을 홀로 하시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있을 뿐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육체의 조건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를 나사렛에서 난 볼품없는 자로 볼 뿐이고 그러한 사람이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처럼 육체로 그들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비록 판단하실 자격은 있으시지만 세상에 오신 이유가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행함의 여부가 아니라 어둠을 향한 강퍅한 마음에 대해서인 것입니다. 육체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강퍅한 마음에 대해 판단하심으로써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예수님 혼자만이 판단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된 판단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판단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판단은 참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 기준은 육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출신 성분과 여러 가지를 근거로 삼아서 예수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합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뜻안에서 판단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판단만이 참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그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사 간음을 하지 않은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간음한 여인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판단 기준은 항상 육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 자들이지 누군가를 판단하는 자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형제를 판단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예수님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나를 알지 못하니 아버지를 알 수 없다.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는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일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의 뜻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어둥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진심으로 말씀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다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이 곧 하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른다면 그 누구도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직접 목격하지도 못하고 다만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 있을 뿐인데 과연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다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가를 살피십시오. 이것이 신자된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마땅한 본분입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육체를 따르는 것인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지를 깊이 살피십시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인지를 살피지 아니할 때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힘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