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 8:21-30 죄가운데서 죽음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스스로 다짐하는 것 중 하나는 '자기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달라져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삼가고, 착한 일을 함으로서 믿는 자답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다짐이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어 자신의 짐으로 남게 됨을 깨닫지 못합니다.

스스로 변화되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할 때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되어 가는 성취감을 맛보기보다는 실패를 겪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변화를 위해 힘쓸 때 분명 변화되는 듯한 흔적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기쁨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자기 변화에서 실패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일순간 변화된 듯한 흔적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변화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뭔가 달라지고 변화되는 듯하다가 다시 본래 자기 모습인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은 철저한 자기 실패를 느끼게 되고 자기 실패에 주저앉아 낙심하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오히려 자신에게 큰짐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변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모습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달라짐은 우리 스스로의 다짐과 노력과 열성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달라짐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 인해서 자연히 보여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스스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이 가신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고 그분의 길을 나의 길로 삼고 나아가는 것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변화란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변화며 달라짐인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 변화라는 올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기 변화를 신자됨의 증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됨의 증거를 자기 변화, 즉 행동의 달라짐에서 찾으려고 할 경우 신앙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됨의 증거는 무엇에서 찾아야 합니까? 신자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란 자신은 전혀 무능력하기 때문에 능력있는 분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항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항복, 이것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다는 신앙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 항복한 사람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항복은 먼저 자신에 대한 포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악한 자임을 깨닫고 '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곧 항복이며 신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들이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도망을 친 후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를 따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하시기 전의 상황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고 모두 예수님에게서 도망을 친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따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는 이 상황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던 사람들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들 역시 죄있는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도망을 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 뒤에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죄를 알았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안 것이 아니며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길에 함께 하는 것, 즉 주와 함께 죽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항복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알았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고백이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곧 어둠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기 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이 어둠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둠에 있음을 안다면 그는 자연히 빛으로 오신 분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2절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자기 죄를 알았으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을 친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신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가신 길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 예수님이 남기신 것은 자신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그 길을 남겨 놓고 하늘로 가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십자가를 지신 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길입니다. 그 길로 오라는 것은 나와 함께 죽자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그 길을 스스로 가고자 하겠습니까? 죽는 길을 갈자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아는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겠습니까? 죽음의 이유인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를 알았다 하면서도 주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죄를 아는 자라 말할 수 없습니다.

21절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24절의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죄의 행위의 결과로 죽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인된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납니다. 죄 가운데서 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가 곧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과 인간의 출신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 즉 하늘에서 나신 분이고 인간은 아래 즉 세상에서 난 존재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합니까?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이런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뱀이 여자를 유혹했습니다. 여기서 뱀은 곧 사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존재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분명 하나님이 사탄을 창조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아래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2:7-9절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전쟁에서 실패한 용, 즉 사탄이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쫓겨난 곳이 바로 땅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단이 이미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사단도 죄도 없는 완벽한 곳이었다는 주장을 하려면, 여자를 유혹한 사단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왔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사단을 먼저 멸하시지 않고 세상을 창조하였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간단히 말씀을 드리자면,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그 죄를 멸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로 말합니다. 이러한 사탄이 땅에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단이 존재하는 곳이고, 그러므로 아래서 났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났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서 난 인간의 실체입니다.

44절에서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귀란 바리새인들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를 한 자들은 모두가 다 마귀 자식인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행위란 자신의 죄를 알았으면서도 예수님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알았으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행위입니다.

마귀의 자식이란 증거는 44절의 말씀대로 아비인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마귀의 욕심이란 앞서 말씀드린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하늘에서 자기의 자리를 얻고자 한 것을 말합니다. 마귀의 이러한 욕심이 세상에서 최초로 드러난 것은,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 곧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단의 욕심으로 행하는 세상에서 인간들이 드러내는 것은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얻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이유 역시 하늘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곧 죄 가운데서 났다는 증거입니다. 마귀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 자식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신 것이 곧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개의 사람은 단순히 우리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단지 천국 보내시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면 지금 당장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자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원히 사는 길이고 생명임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며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길은 죽는 길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어야 할 자라는 이유를 찾지 못한 자는 결코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따를 자는 '나는 죄가운데서 죽어야 할 자'임을 인식하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어야 할 자임을 인식할 때 사라지는 것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성경을 통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보이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그럴 때 그것을 지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길을 가는 자들과는 아예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지기도 합니다.

물론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도 그냥 넘어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 역시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할 자임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판단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당한 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고 옳지 않은 길을 간다면, 나 역시 옳지 않은 길을 가는 자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는 '너는 그르다'는 판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가를 내 삶을 통해서 증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무기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죽이기 위한 말씀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나를 죽이시고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으로 우리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있는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말씀을 아는 신자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가지고 누군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판단하기보다는 실제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무엇이 옳은 길인가를 증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죄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이며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눈에 구체적으로 보이는 죽음의 현실이 없었다는 이유로 이것을 소홀히 하고 업신여기며 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믿음은 인간의 죽음을 사실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죄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이 곧 나의 현실이며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 그 일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